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일상의 사소한 일에서부터 중요한 일에 이르기 까지 선택해야 할 일이 참 많다. 순간의 선택은 선택의 기준에 대한 평소의 확신과 연습을 통해 나와지는 결과이다.
나는 경계앞에 설 때 어떤 면에 기준을 두고 취사 선택하는가?

고대 중국 전한시대의 국상자리에 오른 유학자인 동중서는 '의(義)만 바루고 그 이(利)를 도모하지 아니하며, 그 도(道)만 밝히고 그 공(功)을 계교하지 아니한다'는 글을 남겼다. 대종사님께서 그 글을 보시고 칭찬하신 후 그 끝에 한 귀씩 더 붙이셨다. '그 의만 바루고 그 이를 도모하지 아니하면 큰 이가 돌아오고 그 도만 밝히고 그 공을 계교하지 아니하면 큰 공이 돌아온다'하신 것이 인도품 7장 내용으로써, 공부인으로서 떳떳한 삶의 방향과 지표를 잡아주셨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는 위기상황은 물질적 가치에 사로잡혀 정신적 가치를 잊고 있음에 원인이 있다. 종교를 믿으면서도 그 믿는 동기가 물질적 부만을 원하고, 세속적 영화를 누리는데 이익을 얻고자 종교를 믿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利)는 삶의 편리를 가져다 주는 것인만큼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나 이익이 생기는 상황을 만나면 그것이 과연 옳고 떳떳한 것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의로움과 이로움이 일치할 때는 별 문제가 없겠지만 충돌할 때는 정신적 갈등을 겪게 되는데 이 때에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

정의는 비록 한순간 힘을 쓰지 못하고 손해를 가져오는 듯 하지만 긴 안목으로 보면 결국은 강한 힘으로 인간세상을 지탱해 준다. 의에 합당하고 도 즉, 진리에 어긋남이 없는 선택을 하려면 본말과 주종을 분명히 하고 선후의 순서를 명백히 분석하며 무엇보다도 인과의 이치에 어긋남이 없는 쪽으로 과감히 선택을 해야 한다.

대종사님의 의지는 소극적으로 '계교하지 않는다'에 한정한 것이 아니다. 의를 바루고 도를 밝히는데 노력하면 자연히 복락은 천록으로 다가온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큰 이익과 큰 공덕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 확신이 나에게 있는가? 요훈품 42장에서'큰 이익은 사욕을 버리는 데에서 오므로, 큰 이익을 구하는 사람은 먼저 공심(公心)을 양성하라'고 하셨다. 이에 끌려 의를 접는 것은 떳떳하지 못하다.

'복을 짓되 상이 없어야 큰 공덕이 된다'고 하셨다. 상에 끌려 자기 공을 앞세우는 것은 있는 공도 없애버리는 지름길이니 참으로 조심할 일이다.

<전 영산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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