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 하늘조차 보이지 않는 물한계곡

▲ 물한계곡은 풍부한 수량과 기암괴석, 울창한 숲이 잘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켰다.
도시는 몇 주째 계속되는 폭염에 몸살을 앓고 있었다. 한낮 햇볕이 아스팔트를 녹여버릴 것 같은 기세, '도시탈출'을 해야 했다. 흰구름과 깎아지른 절벽, 깊고 푸른 소(沼), 아름다운 물소리, 하늘을 뒤덮은 잣나무, 충북 영동의 물한계곡을 소개받았다.

물이 차고 맑기로 소문난 물한계곡은 영동 토박이들이 숨겨놓았다는 피서지, 이른 아침 행장을 꾸렸다.
대전남부순환고속도로를 달리는 길에 배롱나무 꽃무리가 선홍빛이다. 가장 뜨거울 때 가장 화사한 꽃을 피운다는 배롱나무, 그 꽃이 제 몫으로 아름다움을 발했다.

선홍빛 꽃 때문일까 주위의 신록도 더 진한 초록빛으로 눈이 부셨다. 반대 색깔인 '보색', 그 상반관계에 놓인 두 색은 주목성을 끌기에 충분했다. 사람 또한 그러하리라. 나와 다른 이가 있어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분명 더 빛나게 하는 것이리라.

출구인 경부고속도로 비룡분기점에서 영동 황간로를 따라 들어선 길, 물한계곡에 가기 전에 반드시 가봐야 할 곳이 또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에서 일어났던 양민 피살사건의 현장이다. 마침 취재 당일에 노근리 평화공원에서 (사)노근리사건희생자유족회 주최로 미군의 폭격에 의해 학살된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합동위령제가 열렸다.

반전과 평화를 생각하다

노근리 사건은 쌍굴에 피신한 피난민을 향해 미군이 무차별적으로 기관총을 난사 300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사건이다. 노근리사건 발생 62주년을 맞아 올해로 14회째 열린 합동위령제였다.

위령제에 앞서 열린 식전행사에서는 향토 예술인들이 희생자의 넋을 추모하는 진혼무를 추고, 무용단이 전통 상여놀이를 펼쳤다. 헌화와 분향이 이어지고 추모사를 통해 피란길에서 억울하게 숨진 희생자들의 넋을 달랬다.

노근리 평화공원에는 멀리서도 보이는 위령탑의 다섯 개 기둥이 있다. 제단 옆으로는 피난을 떠나는 사람들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조각상에 표현된 인물은 모두 일곱 명.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세 명의 자식이다. 짐을 등에 지고 머리에 이고 손에 든 이들은 정처 없이 피난을 간다. 어디로 가는 걸까? 그곳에 가면 희망은 있는 걸까?

영화 '작은 연못'을 떠올렸다. 영문도 모른 채 주민 수 백 명이 미군에 의해 살해된 노근리 사건. 그 시절 생지옥의 현장을 담은 영화 〈작은 연못〉은 가장 사실에 가까운 고증을 위해 4년여에 걸친 현장답사가 있었다고 했다. 생존자 인터뷰를 통한 시나리오 작업을 포함, 장장 8년이라는 제작기간을 거쳤다. 이상우 감독이 키워낸 연극, 영화계의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자발적으로 제작에 참여해 더 주목받았던 영화다.

실제 노근리 사건이 일어난 영동군의 쌍굴은 당시의 상흔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시멘트 벽에는 기관총 자국이 선명했다. 수십 개의 총탄 흔적이 남아있는 학살 현장에는 학생들의 답사가 이뤄지고 있었다.

노근리 평화기념관은 전 세계 대학생이 현장을 둘러보고 피해자의 증언을 듣는 인권 캠프부터, 역사적 교훈과 과제를 조명하는 토론회까지 다양한 행사가 진행된다고 했다. 참혹한 학살 현장 노근리가 인권과 평화의 가치를 되새기는 성지로 거듭나고 있었다.
▲ 노근리 평화공원 조각상.
하늘 뒤덮은 초록 물결

지리적으로 우리나라의 한가운데 위치한 충북 영동은 경북 김천과 전북 무주에 걸쳐 있는 삼도봉과 민주지산(岷周之山), 각호산 등 해발 1000m가 넘는 산들이 장쾌하게 펼쳐진다. 병풍처럼 늘어선 크고 작은 산들이 깊고 아름다운 물한계곡을 품고 있다.

수많은 계곡에서 흘러내린 깨끗하고 시원한 물이 하나 둘 합쳐져 20여㎞에 이르는 계곡을 만든 것이다.
신록이 울창한 터널을 만들어 하늘조차 보이지 않는 계곡, '콸콸콸' 흐르는 계곡물 소리까지 더해져 참으로 더할 나위 없이 시원했다.

햇살 한 줄기 비집고 들어올 틈을 주지 않는 계곡엔 서늘한 한기마저 느껴졌다. 삼도봉과 민주지산으로 갈라지는 삼거리가 있는 전나무 숲까지는 20여분. 미니미골과 음주암골, 쪽새골, 배나무골, 그리고 각호골에서 발원한 계곡물이 수시로 아름다운 소(沼)를 만들고 때로는 등산로를 가로막았다.

물한계곡 입구에서 눈인사를 건넨 식당 주인의 말이 생각났다. 청정 1급수의 계곡으로 산천어, 도롱뇽, 꺽지, 쉬리 등을 볼 수 있다고 큰 자랑을 했었다.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대자연의 숨결을 그대로 간직한 물한계곡은 풍부한 수량과 기암괴석, 울창한 숲이 잘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켰다.

물한계곡은 폭만 줄어들 뿐 8부 능선을 오를 때까지 물 흐르는 소리가 메아리친다. 이따금 협곡을 방불케 할 정도로 계곡이 깊었다. 이끼 낀 징검다리를 건너며 잠시 손을 담가본다. 그 시원함에 손이 시려왔다.

태고적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한 계곡 한쪽, 넓은 바위 의자삼아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를 가슴에 담았다. 마음으로 소리를 듣는다. 잊고 지냈던 마음속 여유가 조용히 찾아든다.

하늘 뒤덮은 초록 물결 속, 텅빈 고요….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은 경이,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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