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에서 새로 입교한 교도 한사람이 음식과 폐백을 올리자, "그대의 마음 여하에 따라서 오늘의 정의가 후일에 변하는 이치를 아는가?" 물으시고 "그대가 나를 상종하되 그 구하는 것이 나에게 있는 것이라면 영구한 인연이 되려니와 만일 나에게 없는 것이라면 우리의 사귐은 오래 가지 못한다"고 하셨다.

교당에서는 대각개교절이나 법인절에 입교식을 거행하여 새내기 교도님들의 교도가 됨을 축하한다. 따뜻한 축하의 응원 속에 입교한 분들이 한 번 던져 보아야 하는 질문이 있다. '나의 구하는 바는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나는 원불교에 다니고 있는가?'

이 질문은 비단 처음 입문하는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오래도록 원불교에 몸을 담고 살아온 사람이라도 본인이 여기서 구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반조해 보며 자신의 신앙 수행의 방향을 견고히 할 필요가 있다.

교당에 입교하는 분들 가운데 가끔은 친교를 사적으로 이용하려는 마음이나 기타 다른 불합리한 목적으로 교당을 오가는 분들도 드물게 있을 수 있다. 이러한 경우 교당을 다니는 동안에 교무님과 주위 교도님들의 도움으로 다시 궤도 수정이 되어지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모처럼 인연을 맺은 진리와 스승, 동지들과 멀어질 뿐 아니라 영생을 통해 씻을 수 없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인도품 15장 말씀을 통해 우리는 제자로서 진리와 스승과 동지들을 모시는 도와 심법도 배우게 된다. 제자로서 스승이나 동지들에게 무엇을 구하며 어떻게 모셔야 할 것인가를 점검해 보라는 내용도 간접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교단 초창기에 초입 교도들이 대종사님께 접근하는 이유가 '신비와 이적'인 경우가 있었다. 구하는 바가 대종사님의 이적이나 신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제자로서 스승을 잘못 모시는 것이다. 이적이나 신비는 극히 일부의 방편이었다. 정법과 정도로 스승을 모시고 섬기는 자세라야 한다

또한 교당이나 사회나 정의가 변치 않고 오래 가자면 이용하려는 마음으로만 가까이 해서는 안되고, 순수한 마음으로 서로 존중하면서 친교를 가져야 한다. '일지(日之)'라는 법명을 받은 사람은 자기에게 좋은 환약이 있으니 의심하지 말고 사서 쓰라 선전 하였으나 교당의 대중이 사지 않자 화를 내며 해가 지기 전에 가 버렸다 한다.

제자로서 구하는 바와 스승으로서 가진 바를 주고 받는 사이에 나의 하기에 따라 혹, 정의가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 일지 같은 취사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

<전 영산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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