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제민 교도·분당교당( 논 설 위 원 )
종법사님께서 연임추대 되셨다. 이번 칼럼은 종법사님께 바라는 바를 써보라는 신문사 측의 요구가 있었고 전화를 끊으면서 주제가 너무 무겁지요? 라고 한마디 덧붙인다. 사실 무겁고 어렵다. 그러나 도미덕풍 칼럼이 사설도 아니고 새 대통령에게 원하는 바를 말하는 어느 중소기업의 사장이 자기 공장 앞의 전봇대를 옮겨 달라고 소박하게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그저 종법사님께 한 교도의 작은 바람을 담은 낙엽 한 장을 도미덕풍의 바람결에 날려 보고자 한다. 종법원까지 갈수 있을지….

종법사님! 묶이지 않는 자유 영혼의 위대한 지도자가 되어 주십시오! 위대한 것은 위대함 자체가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무엇을 바꾸고 이룬다고 해서 위대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위대한 것은 그 마음이 묶여 있지 않고 자유스럽고 활달함에 따라 그렇지 못한 것과 대비되어 드러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중국사람들의 위대한 점이 많지마는 중국의 조선족들은 중국사회에서 한족의 벽에 막혀 높은 지위에 올라가기가 어렵다고 한다. 이점에서는 미국인들이 더 위대한 것처럼 보인다. 미국인들은 48세의 흑인을 그들의 대통령으로 뽑았다. 미국인들의 몸 속에는 400년 전에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빈 몸과 빈 마음으로 신대륙을 찾아 나섰던 선조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일까? 우리 원불교인들의 피 속에는 2천5백년 간 신앙의 우상이었던 불상을 과감하게 불단에서 없애버린 26세 원각성존 지도자의 자유로운 발상이 그대로 유전되고 있다. 종법사님, 우리의 자유 영혼을 이끌어 주십시오.

한 가지 자유 발상의 예로 여자 교무님들의 결혼에 대한 생각이다. 여성성직자의 결혼에 대해 아무도 제한하지 않는데 이런 저런 사람들의 생각이 분분하다. 제도의 모순이니 남녀 차별이니 하는 인식들이 있다. 이런 말에 종지부를 찍는 방법은 제1호 기혼 여자 교무님을 도와주어서 탄생시키면 된다. 그러면 여성 성직자의 결혼이 제도적으로 막혀 있다고는 아무도 말 못 할 것이며 사실적으로도 남자 교무님들처럼 결혼의 여부는 본인들의 자유로운 생각에 맡기면 될 일이다.

두번째 자유로운 발상의 예를 말씀드리고자 한다. 현재(now) 여기(here)가 광대무량한 낙원임을 알게 하는 정책이 우선 돼야 한다. 많은 정책들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현재의 고난을 참아내자는 철학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정책들은 사실은 의도하는 것과는 반대로 원불교를 낙후시키고 사람들을 유인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원불교는 전무출신이라는 직업인을 모집하고 채용하여 임무를 맡기면서 희생을 강요하고 대한민국의 노동법이 정하는 최저 임금도 안 되는 급여를 주고 있다. 당장 내일의 원불교 발전이 멈추어지더라도 오늘 우리는 우리에게 미래를 맡긴 젊은이들을 책임질 도리를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그들이 우리와 그들의 미래를 발전시킬 것이다.

교도에 대한 교화 정책중 실패한 보고다. 10명의 교도가 하나의 단으로 단회를 할 때는 재미있었다. 그런데 하나의 단을 단원 5명의 두 개 단으로 나눈 후 각 단이 10명 채우기 운동을 하였더니 5명 모이는 단회는 재미없었고 오히려 교화에는 마이너스 효과가 났다. 미래에 올지 모르는 교도를 위해 미리 와 있던 교도는 불편과 고통을 감수하자라는 정책, 교단 정책도 미래의 낙원을 맞이하는 준비가 아니라 현재 여기가 낙원임을 구현하는 정책으로 살펴 줘야 한다.

세번째 자유로운 발상의 예다. 새해가 되면 수천명이 총부로 찾아가서 종법사님께 세배 올리는 신년인사 행사는 막아주길 바란다. 과거 교도가 적을 때는 가능 했지만 지금은 시대에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세배는 한 방에서 소수 인원이 상하간 대화가 가능한 공간에서 해야 한다. 1월이 되면 세배일정 잡기 어렵고 어렵게 가서 100미터 멀리 계신 종법사님을 윤곽만 뵙고 마이크 법설 듣고 오면서 하루 종일 걸리는 일정에 교도들이 동원되고 있다. 한 방에 모일 수 있는 기관장 단체장 중심으로 종법사님께 신년인사를 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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