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에서 자연과 우주를 노래했어요"
마흔 살에 완성한
십상도와는 또 다른 농익은 분위기

▲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현림 정승섭 화백.
그가 30년동안 살았던 전주시 완산구 대성동 집 앞에는 맑게 흐르는 개울물을 접할 수 있다. 욕심이 없을 듯한 그의 잔잔한 마음씀과 같다. 그림을 그리는 일을 수행의 방편으로 삼아온 그의 그림세계를 살펴보면 절로 고개가 끄떡여진다. 한국화의 거목인 현림 정승섭(73·효자교당)화백은 그렇게 자연과 우주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수월송풍헌(水月松風軒)'이라는 거실에서 만난 그는 30년만에 다시 완성시킨 '소태산 대종사 십상도'를 조심스럽게 보여주었다. 그림 아래 가지런히 놓여진 화구(畵具)들에서 그의 숨소리와 기운이 그대로 어려 있었다. 그만큼 그의 정성을 엿볼 수 있다.

그가 서른다섯에 시작해 마흔살에 완성시킨 '소태산 대종사 십상도'와는 또 다른 농익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제 손으로 그린 그림이지만 영산성지 영모전에 모셔진 십상도를 볼 때마다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달력, 병풍, 연화장, 카드에 널리 활용된 것 까지는 좋았지만 마음에 차지 않았습니다. 인연이 닿게 되면 잘 그려야지 하는 마음만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효산 조정근 종사님이 다시 한 번 그려 볼 수 있느냐는 제안을 받고 쾌히 수락을 했습니다."

그러나 70세부터 시작한 십상도는 그에게 있어서 호된 시련의 시기였다. 그림 구상에 대한 고민으로 인해 72kg에 달하던 몸무게는 65kg으로 줄기도 했다. 마침 이 시기에 대전 근교인 계룡산 아래에 아파트를 구입했으나 적응 문제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도 그림을 완성시켜야 한다는 압박감이 그를 힘들게 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즐거웠어요. 시작하면서부터 갈수록 어렵다는 생각과 심각함이 밀려왔습니다. 테마 자체가 보통 사람이 할 일이 아닌데 혼자서 그려내야 하니 강박관념이 생겼어요. 정신적 갈등도 느꼈습니다. 갈수록 어려워지고 심각해져 갔습니다. 겁 없이 천방지축으로 끼어들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지요. "

오죽했으면 그가 십상도 1점보다 설경산수화 10점을 그리는 것이 더 쉽다고 했을까 싶다. 그래도 그는 이 어려운 시기를 극복해 나갔다. 거의 모든 작품을 2∼3번씩 그리면서 마음을 추어 잡았다. 전주 화실에서 관천기의상, 삼령기원상, 구사고행상, 강변입정상, 장항대각상, 봉래제법상을 그렸고 대전 근교에서 영산방언상, 혈인법인상, 신룡전법상, 계미열반상을 완성했다.

"봉래제법상이 마음에 제일 걸렸습니다. 인장바위와 봉래정사의 분위기와 배경이 아닌 것 같아 뒤늦게 다시 그렸어요. 제법성지 순례를 수차 다녀 오기도 했습니다."

그의 그림속에 나타나는 거목은 곧 수행과 고행을 뜻한다. 인물 표현에는 그 속에 담겨진 혼의 표현에 몰두했다고 부언한 까닭이다. 머리카락, 눈썹, 수염 한 획에도 기운을 표현하는데 중점을 뒀다. 그는 십상도 중 1∼5상까지를 상구보리(上求菩提), 6∼10상까지를 하화중생(下化衆生)이라 강조했다.

"구사고행상은 대종사님께서 한창 고행했을 때 여기저기 다니면서 초췌한 모습을 잡목이 우거진 것으로 배경을 삼았습니다. 강변입정상의 경우, 큰 나무와 나뭇잎이 흩날리는 모습으로 고행을 표현했고 기존의 큰 인물을 축소시켰어요. 혈인법인상의 시기는 겨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설경으로 표현한 것은 찬 기운을 수행으로 연결시켰습니다. "

그는 십상도 중에서 하나의 그림으로 인해 전체가 업그레이드 되는 경우도 있고 오히려 다운되는 경우도 있다는 점을 밝혔다. 십상 전체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한 연결고리가 된다는 것을 내 비쳤다. 그의 말 속에서 심려깊은 고뇌와 여러움이 느껴졌다.

"그림을 보고 대종사님은 물론 선진 어른들의 얼굴 모습과 분위기에 대해 이야기 할 수는 있지만 작가가 본 세계는 천차만별입니다. 10년 걸려서 다시 그려 보라고 하면 그릴 수 있으나 그릴 때 마다 그 분위기는 달라집니다. 이 그림과 전혀 다른 그림이 나오게 됩니다."

이 자리에 함께한 조정근 원불교100년기념성업회장은 그의 정성이 깃들여진 십상에 대해 "교단에 큰 일 하셨다. 만고에 일월이 됐다"며 치하를 아끼지 않았다.

김경일 원불교100년기념성업회 사무총장 역시 "원불교 미술사에 빼놓을 수 없는 분이다. 원불교 성화를 이야기 할 때 개조 같은 분"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그는 겸손한 표정이 역력했다. 3년간의 작업은 그에게 있어서 인고와 수련의 시기였다. 그가 중국 돈황석굴에서 보았던 그 숱한 벽화를 그렸던 화공의 심경을 십상도에 담아 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그 화공이 순치황제의 전생이었음을 설명하며 자신의 전생사와도 연결시킬 수 있었던 매개체 역할은 바로 그림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십상 아래에 쓰여진 글씨에 대한 설명도 곁들었다. 기존 십상 글씨가 박정훈 원로교무(종사)의 글씨였다면 이번에는 자신이 쓰게 됐다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대산종사가 밝힌 10상 법문을 기초로 해서 통일이 안 된 곳은 원불교100년 기념성업회의 자문을 거쳤다.

"글씨는 평생 쓴 사람을 못 따라갑니다. 제 그림이니 제가 쓴 것이라 보면 됩니다. 한글쓰기가 한문보다 더 어려웠어요. 붓으로 한글 예서체를 쓰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공인된 글씨는 처음이거든요. 이를 보완하기 위해 혼과 기를 모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대종사 십상도 수묵채색화(가로112㎝×세로155㎝)를 보며 간간히 미소짓는 모습에서 무아(無我)를 보았다.

● 현림 정승섭 화백

서울대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동양화과 졸업

신인예술상 수상
국전 심사위원 및 운영위원 역임
전국대학입시 출제위원 3회 역임

코리아 평화 미술전(서울, 동경, 상해 등)
대한민국 종교인 미술전(서울 예술의 전당)
동경 베세토(북경, 서울, 도쿄) 서화전

원미술대전 운영위원장
원광대학교 미술대학 학장 역임
원광대학교 박물관장, 미술관장 역임
중국 천진미술학원 연구교수

서울 롯데미술관 초대개인전
뉴욕 한국화랑 및 LA삼일당 초대개인전
독일 프랑크푸르트 역사박물관 초대개인전

미국 미주리주립대학 초대개인전
미국 웨스트민스터대학 초대개인전
미국 LA시몬슨화랑 부부초대전

서울미술관(서울신문사) 개인전
서울 일민미술관(동아일보사) 개인전
현) 원광대학교 명예교수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