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화가 김홍도의 서당도(書堂圖)를 보면 훈장 옆에 회초리가 놓여져 있고 가운데 앉아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과 훈장의 무섭지 않은 표정, 주위 아이들의 갖가지 표정이 재미있다. 우는 아이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예나 지금이나 가르침의 현장에서는 여전히 훈계가 존재한다. 지도자가 사회나 학교에서 피지도자의 문제 행동이나 잘못을 묵과해 버리거나 무관심하게 되면 옳고 그름에 대한 가치 판단에 무감각해지고 공동체의 질서와 규칙이 무시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므로 훈계는 바람직한 인격형성에 꼭 필요한 지도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훈계를 해야 할 것인가?

인도품 19장은 부하직원을 지나치게 엄책하는 제자에게 내리신 법문으로 하나는 증애에 끌린바 없이 훈계하라는 것이고, 둘은 엄책이 너무 극하면 뒷날의 쇠함을 불러들인다는 인과 보응의 말씀이다.

어떤 분야에 오랫동안 종사하여 기술이 뛰어나거나 노련한 사람을 베테랑이라 부른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 자기보다 훌륭한 숙련가를 만들어 내는데까지 가야 진정한 베테랑이라 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정도의 실력을 갖추려면 훈계를 하는 사람이 상대방을 향한 '진정성'을 담고 있어야 할 것이다. 진지하고 공평한 훈계를 할 때 훈계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흔히 꾸중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살펴보면 꾸중이 꾸중을 듣는 사람이 아니라 꾸중하는 사람을 위해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진정성'이 빠진 꾸중은 엄격한 의미에서 꾸중이 아니라 모진 처벌이나 가학적 분풀이에 불과할 따름이다. 훈계를 할 때 훈계하는 사람의 감정이 섞이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이 감정을 상대방의 성장을 위해 조절해 표현할 수 있어야 올바른 훈계가 될 수 있다.

다른 이를 가르치는 수단으로 훈계를 활용하고 있다면 여기서도 마음공부 전문성이 풍겨야 한다. 훈계를 하는 것도 빈 마음으로 훈계하여야 그것이 참 훈계이다. 훈계의 대상은 상대방의 인격이 아니라 행동이다. 지금 한 행동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추고 바람직한 행동제시까지 해야 한다. 훈계를 듣는 사람이 엄책에 억울한 마음이 들면 반성은 커녕 원망하는 마음을 품게 된다.

우주에 전개되는 일체의 변화의 원리가, 극하면 변화하는 음양상승의 원리이고, 이 원리 따라서 인간사는 인과보응으로 변화하는데 인간의 감정도 극하면 변화하는 것이다.

꾸준한 연습과 훈련을 통해서 인과보응에 비추어 훈계를 훈계답게 하는 법에 숙달해야 인도품 19장에서 배운 것이 모두 공염불이 안될 것이다.

<전 영산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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