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실천의 하나됨 위한 만남의 장

▲ 펜들힐 안내표지판.
1985년에 개봉한 해리슨 포드 주연의 영화 위트니스(Witness)는 미국 펜실베니아주 랭커스터 지역의 아미쉬 마을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아미쉬 교도인 레이첼과 그의 아들이 우연히 살인현장의 목격자가 되어 쫓기게 되고, 이들을 돕던 형사 존(해리슨 포드)이 총상을 입고 이 마을로 들어와 세상 어디에서도 경험하지 못했던 정신적 평화를 만나고 사랑을 찾는다는 줄거리다.

영화 개봉 이후 '아미쉬 공동체'는 대중의 큰 관심을 받게 됐다. 검박한 생활의 상징인 검은 양복과 흰색 셔츠, 전기를 거부하고 자동차 대신 마차를 타고 다닐 만큼 현대문명과 거리를 둔 채 살아가는 신앙공동체가 물질문명의 총아인 미국사회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도 큰 이슈가 되었다.

아미쉬 마을에서 자동차로 두 시간 거리에는 세계적인 영성교육기관인 펜들힐(Pendle Hill)이 있다. 아미쉬교도들이 세상과의 거리를 둔 신앙공동체로 살아가는 것과는 달리 이곳 펜들힐은 미국의 흑인 노예 해방운동은 물론 여성운동과 평화 운동에 앞장서온 퀘이커 교도들의 영성학교다. 간디와 함석헌이 머물렀던 수행시설로 알려진 곳이다.

펜실베니아가 이처럼 다양한 영성문화의 산실이 된 데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17세기 영국 교회는 외형적 성장의 그늘이 커지고 있었다. 권력자가 되어버린 성직자들은 타락했고, 교회는 부패했다. 방직공의 아들로 태어난 조지 폭스(George Fox, 1624-1691)는 참다운 신앙의 길을 고민하던 끝에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구원과 저주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은 각 개인에게 달려있으며 기도를 통해 누구나 하나님과 만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개인의 영적성장을 중시하면서도 사회적 책임을 외면하는 신앙은 '미신'으로 규정하며, 세상의 평등과 평화운동에 앞장섰다. 교회나 성직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이 실천적 영성운동에는 엄청난 종교적 박해가 가해졌다.

그러던 중, 퀘이커 교도였던 윌리엄 펜(William Penn)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채권 대신 신대륙의 넓은 땅을 갖게 된다. 펜은 아버지 이름을 기념하기 위해 그 땅의 이름을 'Penn의 숲(sylvania)', 펜실베니아로 정하고,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는 제도를 마련한다. 영국 내에서 종교적 탄압의 대상이 되었던 아미쉬 교도들과 퀘이커들은 17세기와 18세기에 걸쳐 펜실베니아로 대거 이주를 했고, 곳곳에 공동체를 형성했다.

미국의 대공항기인 1931년에 퀘이커들은 교육과 기도를 위한 터전을 마련했는데, 퀘이커의 창시자 조지 폭스가 첫 깨달음을 얻었던 묵상 장소의 이름과 같은 '펜들힐'로 명명했다.

답사팀이 펜들힐 공동체에 도착한 시간은 점심 무렵이었다. 식사를 함께 하자는 안내자의 말에 공동체 식당을 향했다. 다른 수행시설들과 마찬가지로 유기농야채 위주의 음식이 뷔페식으로 준비되어 있었는데, 인상적인 것은 음식을 먹기에 앞서 자원봉사자가 오늘 자신이 준비한 음식에 대해 설명을 하는 대목이었다. 함께 먹고 일하고 기도하는 수행공동체의 독특한 분위기를 엿보는 듯 했다.

삼삼오오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는 이들 가운데 동양인 학생도 눈에 띄었다.

"계절 학기 프로그램을 신청해서 왔습니다. 자원봉사를 하면서 장학금을 받습니다."
독일에서 대안교육을 전공한 어머니의 소개로 이곳을 찾았다는 한국인 고등학생이었다.
▲ 펜들힐 프로그램.
펜들힐에는 불교명상이나 기 치료, 마사지 등 다양한 주말 워크숍과 학기제로 운영되는 레지던스 프로그램(Residence Program)이 있다. 신학이나 명상 강좌만이 아니라 사진이나 글쓰기 등 인문학과 예술 강좌도 마련된다. 자원봉사를 통한 장학제도 등이 있어 다양한 방법으로 강좌 참여가 가능하다. 최소 3개월 전에는 신청서를 내야 계절 강좌를 수강할 수 있다고 한다.

강의 내용에 따라서 집중적인 워크샵을 하기도 하는데 직접 농사를 지으며 배우는 유기농법 강의, 폭력에 대응하는 새로운 평화 커뮤니케이션 훈련 'AVP(Alternative to Violence Project)훈련 강좌', 문화적, 인종적 다양성을 배우는 Beyond Deversity101 강좌 등 이 시대가 직면한 문제들을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풀어나가기 위한 프로그램들이 눈에 띈다.

영국교회가 내면적 위기에 직면했을 때, 성경을 다시 보고 예수의 실천을 닮아가자는 영성운동을 펼쳤던 퀘이커들이 이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영성운동을 펼치는 방식을 '교육'에서 찾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강좌를 듣는 이들은 고등학생에서 칠십대를 넘긴 고령 은퇴자들까지 다양하다. 이들은 매일 아침과 저녁, 나무의자가 있는 조용한 기도실에 모여 기도를 올리고, 자신이 겪은 영적인 변화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눈다. 형식도, 지도자도 따로 없지만 내면에 충실한 기도와 소통의 시간을 갖는다.
▲ 펜들힐 도서관.
펜들힐의 전문강좌를 듣는 이들이 큰 혜택으로 여기는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옆에 있는 스와스 모어 대학(Swarthmore College)의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퀘이커가 설립한 스와스 모어 대학은 3천명 남짓의 적은 학생수, 하지만 학생 8명에 교수가 1명꼴로 소수정예교육을 해나가는 미국 최고의 인문학 대학이다. 설립 초기부터 미국 최초의 남녀공학대학이라는 파격적 출발을 했고, 전 세계에서 학생 1인당 재정이 가장 많은 학교로 꼽힌다. 실제 스와스 모어가 일년 동안 학생 한명을 교육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비용은 8만 달러(약 한화 1억 원) 이상으로 조사됐다고 한다.

학생수는 적지만 학교 도서관에는 100만권이상의 장서가 있고, 철저한 토론식 수업, 가장 글을 많이 쓰게 하는 교육 등으로 스와스 모어를 졸업하면 글을 잘 쓰는 전문가가 되어 대학원 진학은 물론 전문직 취업이 보장된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때문에 이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 가운데는 하버드대학 등 아이비리그 대학에 동시에 합격해놓고도 스와스 모어를 선택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펜들힐과 스와스 모어 대학은 시설뿐 아니라 프로그램들을 공유하면서 시너지 효과를 얻어왔다고 한다. 수행과 교육이라는 숙제를 풀어갈 국제마음훈련원과 원광대학교 마음인문학연구소의 모델이 될 법도 하다.

펜들힐 공동체의 운영을 맡았던 사회학박사 파커 팔머는 80년이 넘는 펜들힐 공동체의 목표를 한마디로 말하라면 '용서를 위한 끊임없는 교육과 실천'이라 했다. 신앙과 실천을 하나라고 생각하는 퀘이커 신앙을 압축하는 말이다. 또한 펜들힐은 그러한 교육과 실천을 위한 의미 있는 만남의 장이라고 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한 시대와 다음 시대가 만나는 것이다.

개교 100년을 앞두고 수행과 생활이 하나임을 알아가는 삼학(三學)수행의 새 배움터, 국제마음훈련원이 마련되고 있다. 펜들힐의 80년처럼 차분하게 배우고, 흔들림 없이 실천하는 교육과 수행의 새 역사가 시작될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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