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를 다녀오는 배안,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녀들의 이야기 속 맑은 웃음이 싱그럽다. 그 가운데 한 남학생이 우연찮게 내 옆에 앉는다. 서울대 기독교 동아리에서 활동하는 학생이란다. 하나님을 믿느냐고 묻기에 믿는다고 하며, 다른 종교를 인정 하냐고 되물으니, '나 아닌 다른 신을 믿지 말라'고 했기에 인정하지 않는단다.

하나님의 진리 즉, 하나님을 진리라고 하지 않느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한다. "그러면 나 아닌 다른 신을 믿지 말라는 것은, 진리 아닌 것을 믿지 말라는 것 아닌가. 하나님의 박애는 다른 종교를 배척하는 것처럼 편협하지 않다고 본다. 또한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기에 절에도 존재한다고 보는데 학생의 생각은 어떤가?" 미소로 화답하며 연락처를 묻는다.

하나님의 진리를 왜곡하면 '나'라는 개념을 교단주의를 옹호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기 쉽다. 원불교도 개인과 단체이든 궁극적인 지향점을 잃고 보면 신앙을 위한 신앙, 수행을 위한 수행, 나아가 단체 이기주의에 그치기 쉽다.

원불교가 지향하는 것에는 성불제중, 제생의세, 마음을 쓰는 법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원불교의 원경(元經)인 〈정전〉 '개교의 동기'에서 대종사님은 우리가 지향하는 것을 '광대 무량한 낙원'이라고 밝혔다.

원불교 공부인들은 "나는 행복하고, 또 나로 인해 내 주변 사람들도 행복한가"라고 자주 반문한다. 남들보다 좀 공부하는 교도님들은 좀 더 행복하고, 전문 공부하는 교무님들이 사는 교당은 더더욱 행복한지도 되돌아본다. 우리가 신앙하고 수행을 하는 것도 결국에는 함께 길이 행복하자는 셈이니, 수행을 많이 할수록 행복지수가 높을 수밖에 없다. 공부의 척도가 행복의 척도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은 혼자만, 그리고 순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광대 무량한 낙원을 지향한다. 여기에서 '광대'하다는 것은 공간적 개념으로 넓고 큰 것이니 모두의 행복이라 할 수 있고, '무량'하다는 것은 불가에서 무량겁이라는 용어로 많이 쓰이는 것처럼 한량없는 시간적 개념으로 길이 행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기에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나와 내 주위 사람이 행복하지가 않다면, 나의 공부에 빈 곳이 있다는 뜻이니 되짚어 볼 일이다.

그러나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길은 나 혼자 잘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기에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함께 공부하고 일을 하다보면 자신과 주위 사람들이 본의 아니게 힘들 수도 있다. 처음부터 잘 할 수는 없기에 출발점을 스스로 행복하고, 보편적 가치 내에서 나로 인해 주위 사람이 불편하거나 불안하지 않고자 노력함으로 삼아야 한다고 본다. 이것이 공부인이 신앙과 수행의 목적을 잃지 않는 기초이자 바탕이라 여긴다.

원불교는 광대 무량한 낙원 즉, 함께 긴 행복의 길을 걷는 사람의 모임이다.

<삼동연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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