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세불 크신 경륜과 위력 존재하는 성지

지난 호 까지는 익산성지를 현장 중심으로 소개했다. 이번 호에서는 익산성지의 초기 모습을 교사 중심으로 정리했다. 이 글은 대서사시 형식으로 작성했다.
▲ 단풍 속 성탑. 원기89년 사진전.

▲ 단풍 속 공회당. 원기89년 사진전.
대종사는 1924년 가을, 현 익산시 신용동 3천 여 평의 부지에 초가 2동을 신축하여 불법연구회 교명을 걸고 엿 장사, 소작농사로 익산총부 건설을 첫 출발했다.

정결한 청정도량

금강원, 종법실, 공회당, 청하원, 구정원에 이어 대각전에 최초로 '일원상'을 봉안했다. 구내 정원을 조성하여 더할 수 없이 정결한 청정도량을 만들었다.
기관지 〈월말통신〉 창간호에 대종사의 '약자로 강자되는 법문'이 신선한 충격이었다.

대종사의 법설·교리해설·감각 감상·교단소식으로 교리 훈련과 수행에 기여하다가 1940년 6월 〈회보〉 65호로 강제 폐간됐다.
오전5시 대각전에서 2시간 좌선정진을 했다.

매주 법회와 3개월의 하선·동선 훈련에서 대종사 혜명의 등불을 전하는 재가교도와 출가 서원의 교무들이 배출됐다.

초기 교화의 선두주자

삼타원 최도화(전북 진안)는 만덕산 미륵사에서 정산종사를 생불님으로, 변산 봉래정사에서 대종사를 미륵불로 뵈었다.

대종사를 서울로 모시어 박사시화·박공명선·성성원, 진안의 전삼삼·전음광·권동화·송혜환·송봉환·오송암과 종태·종순 자매, 노덕송옥과 김대거를 대종사님께 귀의시켰다.

일타원 박사시화(남원)는 삼타원의 인도로 상경하여 대종사를 뵙고 박공명선, 이동진화를 귀의시켰다. 만덕산 초선 훈련에 공양주로 일하고 매년 익산총부 동·하선 훈련에 많은 선객들 뒷바라지에 알뜰한 정성을 쏟았다.

집안을 일원가정으로 감화시키고 전국 각지를 다니며 제1대에 575명을 입교시켰다.
이타원 장적조(경남 통영)는 강직 활달한 여장부로 봉래정사에서 대종사를 뵙고 출가했다.

부산의 양원국을 인도하여 익산총부에서 대종사를 생불님으로 뵙고 당리교당을 세우니 그의 3녀 양도신이 출가했다. 함경도 청진에서 중국 동북부 용정, 목단강, 장춘, 심양에서 수 십 명을 입교시켰다.

일경의 총부 주재

1936년 9월 이리결찰서에서 익산총부 내에 지서를 두겠다고 통보하고 고등계 순사 황가봉을 지서장으로 파견했다.

당시 대중의 소집회 장소로 사용된 청하원 일부가 이리경찰서 북일주재소가 된다. 황 순사는 매주 법회와 일동일정을 감시했다.

대종사 그를 챙기고 보살피니, 그가 드디어 감복하여 황이천(黃二天)이란 법명을 받고 교중 일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게 됐다.

신화 창조의 교화 위력

일찍이 동학혁명과 삼일운동에 참여했다가 좌절하여 기독교 장로가 되었으나 일제 암흑기에 처한 조송광이 대종사를 큰 스승님으로 알아 뵙고 귀의했다.

사교에 빠진 아버지를 구하러 익산총부를 찾아온 전주 기전여고 재학 중인 그의 4녀 조전권이 출가했다.

경북 금릉의 이춘풍이 영산 방언공사 때 대종사를 뵙고 출가했다. 그의 1남 8녀 중 7녀 이경순이 출가했다. 대종사 친히 이경순 교무가 교화의 꽃을 피우고 있는 개성교당을 방문하여 크게 기뻐하셨다.

한일합방이 되자 만주, 중국, 러시아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4년간 옥고를 치르고 나온 박대완이 대종사를 뵙고 출가했다. 농공부원으로 인분지게를 지고 일하면서 염불 수행을 했다. 이어 마령, 원평, 일본 대판, 용신교당 교무로 교화에 헌신했다.

대종사 설법하실 때에는 박사시화·문정규·김남천 등이 백발을 휘날리며 춤을 추고, 전삼삼·최도화·노덕송옥은 일어나 무수히 예배를 올려 법흥을 돋았다.

1929년 가을 대종사 장녀 길선과 신랑 송도성의 혼례식이 공회당에서 평소 입던 옷과 음식에 신정 예법대로 검소 간명하게 시범을 보였다.

대종사의 부산행

조선총독부에서 신사유람단의 일행으로 대종사의 일본행을 지시했다. 1940년 10월 부산에 가시어 초량교당에 머물었다.

박허주 교도회장과 부산 일대를 돌아보셨다. 밤에는 이기설·양원국·윤기국을 중심한 교도들이 대종사님 말씀 받들며 법열에 심취했다.

총독부는 일본에 있는 억압된 재일 한국인의 항일 독립 의지의 각성과 분발의 계기가 될 것을 우려하여 대종사에게 여권을 발급하지 않았다.

〈불교정전〉 발행

대종사 열반을 일 년 앞두시고 그동안 진행되어 오던 〈정전(正典)〉을 바로 인쇄에 붙이게 하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때가 급하여 이제 만전을 다하지는 못하였으나, 나의 일생 포부와 경륜이 그 대요는 이 한 권에 거의 표현되어 있나니, 삼가 받아 가져서 말로 배우고, 몸으로 실행하고, 마음으로 증득하여, 이 법이 후세 만대에 길이 전하게 하라. 앞으로 세계 사람들이 이 법을 알아 보고 크게 감격하고 봉대 할 사람이 수가 없으리라."

심기일전의 사자후

1943년 6월1일 대종사의 열반은 그 누구도 예측 못한 엄청난 청천벽력이었다. 일경의 삼엄한 경비에 제한된 인원의 장례 행렬은 화장장을 거쳐 공동묘지에 모셔졌다.

망연자실 눈앞이 칠흑 같은 많은 뜻 있는 재가 출가교도들에게 대종사의 유훈은 더욱 다시 새로운 결의로 굳게 다짐하는 심기일전의 사자후로 메아리친다.

"지금 이 나라는 점진적으로 어변성룡(魚變成龍)이 되어가고 있다. 이 나라와 금강산과 그 주인은 다 같이 세계의 빛이 되리라. 그대들은 우리의 현상을 비관하지 말고 세계가 금강산의 참 주인을 찾을 때 우리 여기 있다할 자격을 갖추기에 공을 쌓으라.

그 마음에 한 생각의 사(私)가 없는 사람은 곧 시방 삼계를 소유하는 사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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