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 거름 주고 곡식의 성질에 맞게 정리해서 씨를 심으면, 얼마 있다가 새싹이 오른다. 이내 잡초도 함께 자라나기에, 뽑고 약도 치며 가꾸는 등 일이 많아진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근본은 우주의 근원처럼 아주 맑고 영롱하지만, 수많은 생을 오가며 형성된 심성은 근본을 잊은 채 사회화 과정에 훈습되어 나타난다.

다생(多生)에 익힌 심성은 무의식 속에 있다가 상황에 따라 성향을 띠지만, 한 아이가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서 몇 년간의 모습은 천진난만한 본래면목 그대로다. 다시 맞닥뜨린 인간 세상에서 또 하나의 그 사회성원으로 살아가려면 천진난만함으로만 될 수 없기에 교육을 수없이 받는다.

사람이란 동물로서의 생리적 욕구를 조절하고, 사회화 과정의 일환으로 먹고, 느끼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말하고, 활동하는 것 등을 배운다지만 부작용도 있다. 구분하며 관념을 잘하고 재미있어 하며, 집착을 관리하며, 욕심을 인간관계 속에서 편들어 싸우고 차지하는 것 등도 배운다. 상대적 관념에 의한 우월한 재색명리가 행복이라고 배우는 셈이다.

과학의 발달과 교육은 생활의 편안함과 사회 인식에 발전을 가져왔지만, 상대적인 가치를 부각한 나머지, 상대적 우위에서 존재감을 느끼려 한다.

세상을 움직이려는 권력욕과 베푸는 보람에서의 명예욕 등 상대적 욕심은 또 다른 동기를 부여해서 끊임없는 윤회의 고리를 갖게 된다. 노력하다가, 반대로 좌절하면 음지를 파고들어 술·마약·도박·게임·연애 등으로 도피하거나, 소외에 따른 폭언과 폭력으로 사회의 불특정 다수에게 표출한다.

이는 상대적 욕심에 의해 남으로부터 자신을 규정하여 행복과 불행을 여기는 이 시대의 보편적인 삶의 초상이다.

이처럼 한 순수한 영혼이 다생을 통한 삶에 의해 훈습되지만, 한 생의 시작은 동물적인 욕구가 내재된 천진무구한 아이로부터 비롯된다. 의식주 해결 능력과 사회적 관계를 배우며 삶을 형성해 가지만, 상대적 우월감에 따른 관념과 욕망은 양극성에 의한 상호작용으로 인과의 부메랑이 되어, 언젠가는 반드시 열등감에 따른 피해와 좌절의 상처로 돌아와 심신 간에 몸살을 앓게 한다.

상대적인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배움과 욕심의 그림자도 그 만큼 자라서 오히려 자기의 삶을 구속하게 되니, 그 만큼 비워야 하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

사회 성원으로 자라나면서부터 배워온 그림자에 대해서는, 순간순간 삶의 본질을 통찰하며 비우고, 다시 세워야 하지만 일정 시간을 통하여 되짚어보기도 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진정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가꾸어 갈 수 있다. 원불교의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삼동연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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