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 년 전만해도 물질이란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일상생활하는 데에도 충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회 인식마저 부족했다. 이런 빈곤과 비합리적인 것을 고스란히 개인들이 짊어질 몫으로 감내해야 했다.

빈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한 지도자의 일방적인 제도에 의해 서로 돕고 감내하며 일궈 내야 했고 또 그렇게 했다. 개인의 의견을 존중하며 조율할 여력이 없었고, 사회적으로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간에 존중과 대화가 없다보니 강약의 관계로 치달으며 서로 반목을 일삼았던 시기였다.

반면, 오늘날 물질은 극복이 아닌 활용의 대상이다. 먹지 못해서 굶어죽는 세상이 아니고, 과학의 발달은 몰라서 사용하지 못할 정도가 됐다. 사회적으로도 합리적인 사고로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할 정도이지만, 이제는 상대적 빈곤에 의해서 괴리감을 느끼게 됐다.

목적 상실에 따른 자괴감으로 약물에 중독되거나 자살에 이르는 사람이 많아졌다. 상대적 빈곤과 자아의 상실은 자존감에 대한 문제이다. 이 자존감은 가치관의 삶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사람은 우주 그리고 사회의 한 유기체이다. 진리적인 관점에서 보면 사회의 한 개체로서 높고 낮음이 없이 각자의 역할을 하고, 그 역할을 통해서 각자 영적인 성장을 이룰 뿐이다.

영생을 통하여 볼 때 영적인 성장이 없는 인간 세상은 소꿉놀이와 골목대장 놀이와 다를 바 없는 빈껍데기에 불과하다.

성장이 이루어지면 사람보다 영적 수준이 더 높은 곳에 있거나, 자유로이 어디든지 임의로 왕래를 할 수 있다. 삶의 최고 가치가 아닐 수 없다. 이 영적 가치관의 삶을 안다면 웬만해서는 높은 자리에 오르려 하지 않고, 실력이 없이는 더욱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하지 않는다.

높은 자리는 일을 하는데 필요한 것이자 복 짓는 자리라고 한다. 사실 일하는 자리라고 하는 것은 맞으나 불보살에게 있어서는 복이 아닌, 영성을 풍요롭게 하는 자리이다. 복은 양극성과 집착의 개념이라 중생계에서는 의미가 있지만, 불보살의 세계에서는 복혜의 차원을 초월하였기에 그 의미가 다르다. 자유와 결정보의 의미를 지닌 연유이다.

도가는 가치관의 집단이라, 돈보다는 자리와 명예가 마지막까지 번뇌로 남기 쉽다. 영성의 가치로 보면 자리와 명예는 칼끝에 묻은 꿀과 같은 격이라, 부득이 해야 한다면 조심스럽게 하겠지만, 궂이 찾을 만큼의 매력이 없다. 상대적인 빈곤을 느낄 가치도 못된다.

물질의 세상이 발달 됨에 따라 상대적 빈곤에 치닫게 되니, 정신의 세력을 확장해야 하는데 그 정신은 가치관의 삶에 깨어남이고, 자존감을 갖는 것이다. 그 자존감은 영적 성장에 마음을 두고, 진리에 의한 신앙과 수행을 통해서 자기 발전을 이룬다.

<삼동연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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