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명권 교무 / 원봉공회
원불교 봉공회의 시작은 어디일까? 대종사님께서는 20여 년간의 구도 끝에 일원의 진리를 깨치시고 이어 제자들과 이웃과 사회, 국가를 위하는 사업으로 정관평 방언공사를 시작하셨다. 대종사님께서는 간척지 방언공사를 하실 때에 "이것은 모든 사람의 버려 둔 바라, 우리가 언을 막아 논을 만들면 몇 해 안에 완전한 논이 될 뿐 더러 적으나마 국가 사회의 생산에 한 도움도 될 것이다. 이러한 개척 사업부터 시작하여 처음부터 공익의 길로 나아감이 어떠하냐" 하실 정도로 교단의 시작과 함께 이웃과 사회 국가를 위하여 봉공활동을 전개했다.

즉 회상이 만들어지자마자 회상과 사회, 국가, 세계를 하나로 보고 활동해야 함을 천명하셨다. 대종사님의 대를 이으신 정산종사님께서도 대종사님의 열반으로 인한 충격이 가라앉지도 못했을 시절에, 우리의 아픔을 접어두고 동포와 민족과 사회 국가를 위하여, 먼저 그들에게 손길을 내밀었다.

광복을 맞아 들어오는 전재동포와 일제의 압박에서 문화를 잊어버린 국민들을 위하여 한글보급활동을 그리고 이 나라의 기둥으로 장양될 수 있는 학교설립, 그리고 전재동포구호사업을 전개하셨다. 전재동포구호사업은 13개월 동안에 총부 교정원 간부부터 지방교도들이 함께 하여 나눈 구호의 손길이 80여 만명에서 이르렀다. 이는 당시 만연하는 전염병도 불사하고 민족의 어머니가 되어 목숨을 바쳐 펼친 구호 사업이었고, 제2의 법인성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봉공활동이고 사회국가와 교단이 하나가 되어 나갔다.

이런 봉공활동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정리하고 펼쳐 나간 분이 대산종사님으로 "종교가 봉공활동이 없으면 산 종교가 아니라"고 하시며, 출가봉공회, 재가봉공회, 국가봉공회, 세계봉공회의 4대 봉공회를 교단의 조직으로 만들라 했다. 교리 속에 있는 무아봉공의 실천을 보다 세세하게 현실 속에서 사회, 국가, 세계와 하나가 되어가도록 실천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그에 맞추어 원기50년부터 전국적으로 각 교당 봉공회가 만들어졌고, 내 이웃사람과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 어려운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도움의 손길을, 힘 닿는 대로 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봉공회는 교단의 조직이 아니라 하나의 단체로 전락이 되고, 지역사회의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사용해야 하고, 출가교도 원호사업과 재가교도 원호사업, 국가, 세계로 쓰여져야 할 봉공회비는 어느새 교당의 제2 유지비로 전락이 되어지고, 봉공회는 물건 파는 회원, 법회 끝나고 국수파는 아줌마로 전락이 되고, 원불교 교도는 다 봉공회원이었는데 이젠 분리가 되어 나이 많은 대부분의 주부들만 남아 있다.

교단에서는 교화, 교육, 자선의 3대 사업을 해야 한다고 늘 이야기 한다. 봉공회가 지역사회와 국가 세계에서 활동하게 된다면 종교와 사회가 하나가 되어 어렵고 힘든 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나누어줄 수 있고, 세상은 더 밝고 훈훈한 세상으로 변화가 될 것이다. 아울러 교단에 대한 이미지도 더욱 좋아지고 교화의 물꼬를 열어가는 길이 되기도 할 것이다.

또한 교당이 열린 곳에서는 반드시 지역사회와 함께 해야 한다. 그리고 원불교봉공회는 교당봉공회로부터 시작해 교구봉공회 중앙봉공회로 만들어졌다. 즉 이것은 지역에서 더욱 필요해서 만들어지고 나아가서는 교구와 중앙에서 필요해서 만들어진 교단의 조직이다. 그런데 지금은 교당 봉공회의 역할은 너무 미약해지고 있다.

겨우 교당에서 물건을 팔아서 교당건축기금으로, 야유회비로, 기타 교당운영비로 사용되는 봉공회비가 되지 말아야 하고, 나이든 교도만, 여자교도만 봉공회원으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처럼 원불교교도는 다 봉공회원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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