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힘을 느끼며 찾는 토테미즘과 샤머니즘을 넘어서, 진리를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들의 모임. 학문이나 윤리가 아닌, 진리와의 교감과 영성을 일깨우고 심신을 닦아가는 기능이 있어 종교라 한다. 가장 으뜸 된 가르침을 뜻하는 종교에는 수행하고 봉사를 기본으로 하는 사람들과 그를 좋아하고 함께하는 사람들이 모인다.

이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며 일하다보면 어느새 행정의 중심에서 정치하는 이와 따라주는 이가 생긴다. 하지만 종교가는 사회와 달리 그 본질에 높고 낮음이 없다. 영적 성장에 따른 지우의 차별이 있지만, 스승과 제자라는 도의적인 간결한 모습이 있을 뿐이다.

종교가에서 수행하고 일하는 데에 가장 기본적인 모습은 진리를 표준삼고, 진리에 가장 가까이 있는 스승의 가르침에 바탕한다. 이 부분도 여의치 않을 때는 공의를 통해 해결해 간다. 만약 수행하지 않으면 수행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상만 가득하여 진리와 스승과 법과 회상 없이 자행자지하게 될 때 문제가 많아진다.

정신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종교가에서의 다수결은 가장 낮은 단계의 의결이다. 전문가 한 사람의 식견을 일반 대중 여럿이 따라오지 못하듯, 도를 얻은 사람의 지견을 대중이 다 모른다.

이런 연유로 종교가에서는 성직자의 위상을 보호하려다 보니 부작용도 있었다. 성직자는 진리와 신의 매개자로서 불가침의 영역이 될 뿐만 아니라 절대 권위에 장막을 치고 자행자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교리를 왜곡하여 이웃 종교를 배타하고 천당에 가는 티켓을 파는 등으로 민중의 인심을 현혹시켰다. 진리적 종교가 아닌, 한 종교가 자기 잇속에 맞게 진리를 규정하고 설정한 셈이다.

종교가 자기 입맛에 따라 진리를 규정하는 즉시 그 종교는 타락하게 된다. 진리적 종교 즉, 진리 앞에서는 종교와 성직자와 수행자 모두가 겸허해져야 한다. 그래야 종교가 건실하고 수행자는 진리와 함께하며 영성이 진급할 수 있다. 수행자가 대중보다 진리에 한 발 앞서 있다 해도, 충분한 회화를 통해서 공감을 형성하고 이끌어가야 한다,

종교가 살아있는 척도는 신도수가 아니다. 진리 앞의 겸허한 수행자에 달려있다. 원불교가 많은 성장을 해왔다. 교화, 교육, 자선에 방송과 군종교화를 더하여 사회적 인지도가 높아진 것도 사실이다. 원불교의 규모에 의해 과분할 정도다.

교육은 교사의 질을 넘어서지 못하듯이 원불교의 교화는 교무의 질을 넘어서지 못한다. 원불교 교역자가 이웃 종교의 교역자보다 비교 우위에 있다고 자만할 것이 아니라, 진리 앞에 늘 겸허한 수행으로 이 시대를 이끌어가야 한다.

<삼동연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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