波瀾苦海의 一切生靈

천지는 끊임없이 순환한다. 그래서 일어나는 것이 바로 '바람결'이며, 이 바람결, 그대로 일어나는 것이 물결이며, 물결 따라 나무에도 결이 생기고 바위에도 바위결이 생기고, 나아가 모든 만물에도 결이 있기 마련이다. 그 중에 눈으로 직접 잘 보이는 결은 아무래도 물결이다.

그런데 물결에도 크고 작은 물결이 있다. 즉 물의 표면에 일어나는 예사로운 물결을 '波'(물결 파)라 하면, 마치 좌우로 우거진 난초 잎이 멋대로 문드러져 있듯이 큰 물결을 '瀾'(큰물결 난)이라 한다. 그렇기로 '파란고해'(波瀾苦海)란 크고 작은 물결 속에서 허우적대며 허덕이는 고통의 바다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예사로운 물결은 무엇이며, 큰 물결은 무엇이란 말인가? 일단 큰 물결은 삶의 고통 속에서도 근본적인 고통인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말하니 낳음도 큰 고통이요, 늙음도 큰 고통이요, 병듦도 큰 고통이요, 죽음도 또한 큰 고통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작은 고통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삶의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과정적 고통으로 첫째는 '사랑을 여의는 고통'(愛別離苦), 둘째는 '구하려 하나 얻지 못하는 고통'(求不得苦), 셋째는 '원망과 미움을 만나는 고통'(怨憎會苦), '이것저것 잡다한 생각으로 쉴 수 없는 고통'(五蔭盛苦)을 말한다. 즉 삶의 과정 속에서 부딪치는 고통은 이상의 네 가지로 분류하고 있기는 하나 이를 더욱 간추려 보면 물욕과 애욕, 또는 애착과 탐착, 두 가닥에 연한다 말할 수 있다.

"산을 떠나 강의 흐름을 타고 흘러내리다가 중도에 멈추는 것은 다만 두 언덕에 걸리기 때문인데 이 두 언덕이 곧 물욕과 애욕일 따름이다."〈사십이장경〉의 부처님의 말씀이나 "재색의 화는 독사보다도 심한 것이다"(財色之禍, 甚於毒蛇) 발심수행장이라는 조사의 말씀을 참고해 볼지라도 전혀 의심할 나위 없는 참다운 법설임을 어찌 부인할 수 있으랴.

일찍이 인간의 삶에 얹어진 어쩔 수 없는 근본적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한 밤중에 궁성의 담을 넘어 출가하신 부처님의 가장 깊은 9년 고행 끝에 얻어낸 큰 깨달음은 납월팔일 새벽 밝은 샛별을 보시고 비로소 얻어낸 것이었다. 똑같이 방황을 말끔히 청산할 수 있었던 대각의 그 날에 소태산대종사님께서는 "맑은 바람 달 떠오를 때 만상이 스스로 밝더라."(淸風月上時, 萬像自然明)고 읊으셨다. 어디 그 뿐인가?

시내 산 숲속을 방황하다가 목마른 예수는 물을 마시려고 거울처럼 맑은 물을 굽어보시다가 문득 자신의 얼굴이 엊그제 꿈에 나타나 독생자를 크게 부르던 하나님의 얼굴을 자신이 꼭 닮았음을 비로소 깨닫고 하나님의 순실한 종이 될 수 있었다. 모두 어둠이 청산되는 순간이었다.

<문역연구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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