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적이란, 진리적이란 의미도 내포한다. 그런데 사실적이란 말을 내 놓음은 진리의 소식이 앎에 그치지 않고 일상생활에 부합되어 야 한다. 생활과 수행에 도움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도(道)란 진리의 모습이자 진리의 길이고, 이 진리가 사람에 이르면 인도(人道)가 된다. 이 인도를 행함에 따라 은혜가 나타나는 것을 덕(德)이라 부른다. 덕에 이르기까지 마음과 생활이 습관을 길들이는 수행이 훈련이다. 즉 사실적 도덕 훈련이다.

사실적이라 한다면 그 근간인 진리를 알아야 한다. 진리를 알아가는 데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영안과 법안이 열려서 진리의 전체와 근원과 운용을 보아서 아는 길이고, 또 하나는 진리를 스승님으로부터 배워서 삶 속에서 해석하고 삶으로 증득해가는 길이다.

영안과 법안이 열려서 진리와 교감하며 알기에는 쉽지 않다. 설사 안다고 해도 대부분은 자기의식의 범주 속에 있는 것을 알 뿐이다. 그래서 진리를 보았다는 사람들과 수행단체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전체를 아울러 보는 사람이 드물고 그 진리를 삶속에서 원만하게 드러내기가 힘들다.

영안과 법안으로 법의 주체로 삼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회상이 합리적인 체계 속에서 크려면 진리를 배워 삶속에서 해석하고 증득해 가는 것이 좋다.

그렇다고 이것만을 주체로 삼다가는 그 회상은 보편적 윤리를 넘어서기 어렵다. 스승은 항구(恒久)한 세월을 두고 법을 짜지만 주로 그 시대의 인심의 정도에서 법을 내놓기 마련이다. 인심의 발달에 따른 진리의 새 소식은 그 시대의 몫으로 남는다.

종교의 본질은 진리와의 교감과 내면화에 있다. 샘물 같은 진리 소식으로 세상의 인심에 따라 진리와 한 발 더 다가서게 하고 세상을 열어주는 것도 여기에서 나온다. 이것이 종교의 중요한 기능이라 일확천금을 노리듯 수행하는 사람도 있고, 깨달았다고 하는 무리가 혹세무민 하는 경우도 많다.

일반적인 안목으로는 진리와 스승에 대한 법맥과 대의를 보면 알 수 있고, 속 깊은 수행자는 말 한마디 글 한 귀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서유럽에서는 한 가지의 일을 20년을 해야 전문가라고 하지만, 천재라면 전문가가 인정할만한 재능과 성과를 보여야 한다. 전문가도 자신을 넘어선 천재를 알아보기 어렵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알기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이해와 증득된 진리로, 교감에 따른 내면화의 진리를 알아보기 어렵지만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된다.

염려의 문을 닫기보다는 두 문을 균형 있게 열어놓아서 속 깊이 수행하는 사람이 많이 나와서, 사회가 존경하고 영성을 열어주는 인물이 되면 좋겠다.

<삼동연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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