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신으로 치부되던 사주, 보석같이 빛내다
사주명리학과 동양의학 접목
'명리체질의학' 선보여

▲ 동양학 박사이자, 도학자인 김민재 씨. 왼쪽에는 그가 논문발표 후 당시 양현수 원광대학교 동양학대학 교수가 그에게 건넨 '사생유명 부귀재천'휘호가 놓여 있다.
▲ 우리나라 1000년 도맥을 잇는 효천 선사가 그에게 건넨 주장자.
누구나 자신의 '운명' 앞에서 용을 쓰고 몸부림 친다. 이로인해 마음과 몸에는 온통 멍이 가득하다. 그렇지만 바람의 방향대로 휘청이지 않고 나아가기 위해서는 나침반이 필요하다. 그 나침반을 찾기 위해 서울 종로 김민재(47) 씨를 찾아 갔다. 서재 차창 밖으로 시간이 멈춘 듯 눈이 내렸다. 결연한 빛깔로 점령해오는 그 눈발을 걷잡을 수 없다.

그가 하산하던 날 내리는 눈 속에서 느꼈다던 '맑음과 가벼움과 편안함'이 이런 광경일까? 그의 미소가 눈처럼 포근히 전달됐다. 이런 그를 박사라고 불러야 할지, 도사라고 불러야 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눈동자 속에는 그동안 그가 거쳐 온 스승들이 다시 비춰지기 시작했다.

도사 인생의 시작

효천 대선사는 그를 10년 간 태백산의 혹독한 수행으로 이끈 스승이다. '돈오'를 몸소 체험케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는 그 스승에 대해 회상하듯 말했다.

"그 분은 생사를 초월하지 않으면 각을 이루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죽어서 내려갈 각오를 준비시켰습니다. 제가 수행한 곳은 스님들의 하안거, 동안거의 장소가 호텔로 비유될 만큼 열악한 장소였죠. 한 여름 토굴 속에는 나 이외에도 많은 생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21마리의 독사였죠. 내가 만화 주인공도 아니고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습니다. 이렇게까지 수행해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라는 회의감도 잠시 들었습니다. 그래도 뱀이 내 몸을 타고 올랐을 때 오로지 할 수 있는 일은 수행뿐이었죠."

겨울이 오기 전까지는 토굴 속 집게벌레와 한바탕 씨름도 했다. 온 몸이 집게에 물려 피부병 환자처럼 되고 말았다. 벌레의 노린내에 질식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몸의 이조차 죽이지 않았다던 스승의 스승인 '경허선사'의 예화를 본 받아 결국 그것을 초월하게 됐다. 당시 그는 혹독한 수련 및 생식으로 45kg까지 체중이 줄었다.

"제가 겨울에 얼어 죽지 않았던 것은 멧돼지 덕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낮에는 빛을 보지 않다가 밤이면 양손에 촛불을 들고 산 정상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반대편 산 정상에서 들리던 멧돼지 소리가 하루하루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어느 날인가는 그들이 내 바로 앞까지 다가왔습니다. 그때 알았어요. '내 마음에 해함이 없으면 짐승도 그것을 아는 구나' 라고. 그때부터 멧돼지는 가족을 데리고 매일 똑같은 시간이 되면 놀러왔다가 돌아가곤 했죠."

그의 이야기속에는 많은 동물들이 등장했다. 멧돼지도 오지 않는 봄이 되니 겨울잠을 마친 다람쥐며 산토끼가 찾아오고, 새들이 머리에 앉았다. 그는 점차 미물과의 교감을 늘려갔다. '기 철학의 거대한 실존적 체험'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꼬박 10년을 산의 사계와 어울린 기의 율동과 함께 수행해 나갔다.

그는 선을 진행하는 동안 '무념무상(無念無想)'을 이루려 무단히 애를 썼다. 이와달리 온갖 잡생각으로 고민이 더해갔다. 오히려 잊었던 과거까지 생생히 생각났다. 그래도 거기서 멈추지 않고, '무념무상'이 올 때까지 생각하고 또 생각해 마침내 3세 전생까지 보게 됐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무념무상에 접어들었다.

눈이 왔다. 그는 태백산 꼭대기에서 오도송을 읊었고 눈발이 하염없이 흩날렸다. 그는 눈 하나하나의 기운을 읽었다. "저 눈이 나고, 내가 저 눈이고, 저 흰 빛이 내 마음이고, 내 마음이 저 흰 빛이고 자타를 나눌게 없구나를 느꼈습니다" 그 순간 함께했던 효천 선사는 "각을 이루었으니 이제 내려가라"고 명했다.

"바랑과 승복 하나만 걸치고 올라왔는데, 긴 머리에 발자국만 남기며 산을 내려왔습니다. 뒤돌아보지 않았죠. 눈 쌓인 산길에 첫 발자국을 남기며 느꼈습니다. '발자국을 남기는 것이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고, 남기지 않은 저것이 내가 집어내야 할 공간이다. 과연 지금 나는 어디에 있는가. 뒤에 찍힌 발자국이냐, 앞으로 남게 될 발자국이냐, 바로 현세! 여기로 미래와 과거와 현재가 하나로 귀일하고 있다' 삼세가 곧 하나라는 것을 발자국을 남기며 깨달았죠."

박사 인생의 시작

"스승님께선 저를 도학계로 가서 많은 법을 펴게 하려는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족한 것이 많고, 공부를 더 하고 싶은 마음에 원광대학교 동양학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해 10년 동안 공부를 하기 시작했죠. 팔공산 거산님(유림)이 가르쳐 주신 주역, 명리, 풍수에서 시작된 '점수'의 본격적인 접근인 것입니다."

처음에 그는 자신이 깨달은 부분과 동양사상이 어떤 상관성이 있는지에 대해 초점을 맞췄다. 곧 그는 모든 동양의 철학이 바로 음양오행론에서 비롯된 것임을 감지했다.

"동양에서는 '음양론'과 다섯 개 실제 물질인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로 나눌 수 있는 '오행론'으로 세상을 표현해냅니다. 내가 주창하고 있는 명의동원(命醫同源) 사상은 인간의 '운명'과 '생명'은 하나로 맞물려 있다는 것입니다. 형이상학적인 '음양(=운명)'과 형이하학적인 '오행(=생명)'이 서로 맞물린 음양오행론과 같은 근본 토대로 이뤄진 사상입니다. 세간에서 사주명리학을 미신으로 치부했지만 이것을 동양의학과 맞물려 파헤쳐 그 근거를 명확히 한 것이 저의 박사논문입니다. 사실 음양오행론은 몸에 적용하면 한의학이 되고, 운명에 적용하면 사주명리학, 대지에 적용하면 풍수지리학, 하늘에 적용하면 고천문학, 병법에 적용하면 병가에서 이야기하는 손자병법이 됩니다."

동양사상을 이해하는 키워드가 바로 '음양오행론'이고 이것은 곧 동양의 문화 전반이 함께 뿌리를 나눠 가진 최소사실인 것이다. 그는 사주명리학과 동양의학을 결합하기 위해 그 방면의 최대 경전인 〈적천수滴天髓〉, 〈황제내경黃帝內經〉을 파헤쳐 결국 운명과 생명은 그 근원이 같다는 사실을 증명해냈다. 그것을 통해 어떤 사람의 어디가 좋지 않아 언제 어떤 병으로 사망할 수 있다는 것까지 알아낼 수 있게 됐다. 이는 5대째 내려오는 한의 집안의 후손이라는 점과 그가 도가에서 오랜 수련을 거치고, 학문에 몰두함으로써 나온 결과라 더욱 값지다.

그는 이것을 '명의동원' 사상이라 불렀고, '명리체질의학'란 학문으로서 분류했다. 실질적인 근거에 의해 밝혀진 '명리체질의학'은 한국학술지인용색인(KCI)에 등재돼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한국연구재단의 후원을 받아 총 3500만원의 연구비가 제공됐지만 그것을 선택하지 않고 '과유불급'이란 말로서 천천히 그 진수에 다가갈 것을 약속했다. 사람의 생사를 병이 오고나서야 개복하고 수술해서 고치는 서양의학이 아니라 사주명리와 동양의학을 통해 언제 어떤 병이 올 줄 알아서 미리 음식만으로 치유할 수 있는 사상이 명의동원이다. 그는 너무 급진적 사상이어서 타겟이 되기 쉬운 점을 경계했다.

그의 학계의 스승들은 그의 진가를 알아보고 그에게 최대한 지원과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논문의 탄생을 지켜보며 '강호의 학문을 학계로 끌어올린 유일한 사람'이라는 찬탄을 보냈다. 그로인해 그는 원광대학교 동양학대학원 사주명리학과의 첫 박사학위자로 이름을 올렸다. 학과 탄생 12년 만의 일이기도 하다.

종로에서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한 상담과 대기업 및 학교 강의를 이어가며 군자삼락 중 하나인 '독서'에 푹 빠진 그는 수·목요일이면 휴대폰을 끄고 산으로 잠적하는 현대판 도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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