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적 종교가 보편에 치우치다 보면 학문과 윤리의 범주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진리적인 이해와 더불어 영적교감이 일상생활 속에서 합리성을 갖는 많은 사례로 나와야 하고,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공부의 잣대인 법위로 이어져야 생명력을 갖는다.

법위를 얻은 이를 사회에 내놓아서 사회가 그에 걸맞은 인격에 납득할 수 있을 때 원불교의 교화는 비롯된다.

대산종사께서는 "닭 천 마리가 있어도 봉황 한 마리라도 있어야 새끼 쳐서 점차 봉황의 세상이 된다"고 했다. 닭 천 마리가 있으면 봉황 한 마리 정도는 있다. 그러나 사표가 되고 품어서 키울 수 있는 봉황이 없으면 법기인 닭도 평범함을 벗어날 수 없다.

스승이 있다 할지라도 진리적인 이해와 교감에 따른 깊은 수행 없이는 이 또한 봉황이 되기 어렵다. 속 깊은 수행으로 내면화하며 서로 이끌어주는 가운데 봉황들이 튼실하게 커간다.

진리의 내면화 작업이 도덕훈련이다. 사실적이란 말은 일상생활에서 도가 실행되어 덕으로 나타남을 말한다. 한두 번 해보는 것 아니라, 마음의 습관이 되고 몸의 습관이 되어서 동물적인 감각으로 이어져야 한다.

한두 번 해보고 '이런 거'라고 이해하면, 이해의 범위 속에서 한 동안은 도의 모습을 보일 수는 있다. 그러나 생사나 재색명리의 일이 갑자기 들이닥치면 중생의 본색이 나오기 마련이다. 사실적인 준비가 되지 않아서 그렇다.

세속을 떠나 산속에서 공부하면 경계가 없어서, 마음 길들이기는 쉬울 수 있으나 힘이 없다. 일반의 삶 속에 들어와서 거친 사람들과 대면을 하면 정신이 산란해지고, 복잡한 일을 해내려고 하면 무엇부터 해야 할지 막막해지기 일쑤다. 산속에서만 공부하는 사람이 이해의 폭이 좁고 짜증을 잘 내는 경우는, 온실의 화초처럼 경계 없는 곳에서 마음의 힘을 길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삶 속에서 사람들과 잘 지내고 일도 적당히 해내는 사람이 반드시 수행을 잘하는 것도 아니다. 삶 속에서 영성이 깨어있지 않으면 자기 앞길 잘 가누는 일반인에 지나지 않는다. 수행자는 늘 영성이 깨어있어 일 속에도 맑고 평온하다.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데 거친 소리 없이 자연스럽고, 시키는 자리에서는 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마음이 일어나게 한다.

원불교의 수행은 삶 속에서 하는 수행이다. 어렵기도 하고 일상성에 흐르기도 쉽지만, 까닭을 갖고 수행하면 삶 속에서 도와 덕이 살아있다. 경계 속에서도 영성이 깨어있어서 맑고 지혜로우면서 널리 은혜를 미친다.

진리적인 의미에서 수행은 삶이다. 삶을 잘 사는 길이 수행이고 수행이 삶을 잘 사는 길이라, 삶을 떠나 수행을 하는 것은 고기가 물을 떠나 헤엄치려는 것과 같다.

<삼동연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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