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만남

"야, 오팔봉 이게 얼마만이냐!"
깜상은, 아니 황망태는 내가 방에 들어서자마자 한눈에 알아보고 달려와 덥석 끌어안았다.

그동안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초청장을 보냈지만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망태와 은미도 온다기에 참석한 것이었다.

내 이름도 오팔봉이라 특이했지만, 녀석 역시 황망태라는 특이한 이름도 이름이지만 마른 새우처럼 삐쩍 야위고 얼굴이 까매서 깜상이라 불렸는데 어느덧 세월의 두께만큼이나 몸집이 불어나 있었고, 얼굴도 흰죽마냥 허여멀건 한 게 제법 때깔이 났다.

"짜식아, 숨 막힌다. 그만 좀 놔라."

녀석의 반가움의 포옹이 싫지는 않았지만 30년이 넘어 처음으로 보는 친구들 앞이라 깜상의 오버된 듯한 행동이 왠지 쑥스러웠다.

친구들과 한바탕 소란스럽게 반가운 인사가 오가고, 나는 깜상이 권하는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간간이 소식은 들어 알고 있었지만, 깜상은 한눈에 봐도 성공한 사람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여유로움이 배어나왔다.

깜상은 새삼 내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다 씩 웃더니 잔을 내밀고 맥주를 가득 채웠다. 녀석의 못난 덧니는 여전했다.

녀석의 덧니를 보자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약간의 서먹하던 감정이 금세 불알친구 시절로 돌아가 편안했다.

"차은미는 같이 안 왔냐?"
녀석의 잔에 맥주를 채우며 물었다.

깜상과 은미가 결혼했다는 소식은 들어 알고 있었다. 내가 중학교를 들어가면서 강릉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나와 은미와 깜상은 어려서부터 설악산 오색약수가 있는 산토끼와 발맞추는 깡촌에서 살았는데, 유독 은미와 깜상은 만나기만 하면 그렇게도 싸우더니 무슨 조화인지 모를 일이었다. 맥주잔을 기울이다 창밖을 보니 흐릿하던 하늘이 기어이 배추흰나비 떼의 군무(群舞)처럼 탐스런 함박눈을 펑펑 퍼붓고 있었다.

"곧 올 거야. 큰놈이 말년 휴가 나와서 얼굴 보고 용돈 좀 주고 온다고 했거든."
깜상은 아들이 군대를 갔는데, 스물네 살 뱀띠라고 했다. 나는 무슨 이런 우연이 있나 싶어 깜상을 새삼 쳐다보았다.

깜상과 은미도 녀석의 아들과 나도 뱀띠였던 것이다.

2. 그들과의 어린시절

깜상은 초등학교 일학년 여름, 뱀 때문에 큰 곤욕을 치른 적이 있었다.
유난히 개구쟁이로 장난이 심했던 녀석은 같은 또래의 여자애들에게 경계대상 1호였다.

남들은 징그러워하는 뱀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여자애들을 보면 불쑥 코앞에 들이대곤 했는데, 여자애들은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를 지르며 도망을 가거나 그 자리에 얼어붙어 울곤 했다.

그날도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산모퉁이를 도는데 저만큼 앞에 은미를 포함해 세 명의 여자애들이 참새처럼 조잘대며 가고 있었다.

그걸 본 깜상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가 싶더니, 호주머니에서 다른 뱀과는 달리 무늬가 꽃 댕기처럼 알록달록한 화사(花蛇)를 꺼내들고 발꿈치를 든 채 여자애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리고 냅다 "뱀이다!" 소리를 질렀다.

깜상은 그 뱀을 은미의 목에 목도리마냥 걸어주었다.
"엄마야!"

목에 걸린 뱀의 차가운 감촉에 놀란 은미가 소리를 지르는가 싶더니, 뱀을 보고는 설맞은 멧돼지처럼 펄쩍펄쩍 뛰더니 그대로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땅바닥에 혼절한 은미는 온몸에 경련을 일으켰고, 꼬맹이들은 그런 은미를 보고 어쩔 줄을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그 와중에도 깜상은 땅에 떨어진 뱀을 잡아 호주머니에 넣고는 개울가로 달려가더니 입안 가득 물을 물고와 은미의 얼굴에 뿜었다.

그 모습을 본 꼬맹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개울가로 달려가 입에 물을 담아와 은미의 얼굴에 마구 뿜어댔다.

한참 뒤에 물에 흠뻑 젖은 은미가 깨어났고, 그날 깜상은 아버지에게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맞았다.
은미는 그날 사건으로 며칠 동안 학교에 가지도 못하고 끙끙 앓아누워야 했고, 깜상은 길에서 만나는 동네 어른들로부터 꿀밤을 맞아야만 했다.

3. 결혼과 가죽 사업

"은미하고는 어떻게 결혼한 거냐?"
나는 깜상을 그토록 싫어하던 은미가 녀석과 결혼까지 한 것이 몹시 궁금했다.

깜상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자그마한 지갑공장에 취직해 몇 년이 지났는데, 불황으로 지갑공장이 문을 닫게 될 형편이 되자 공장을 인수했다.

그리고 우연히 태국에 여행을 갔다가 그들이 코브라를 비롯한 뱀 껍질을 벗겨 튀겨 먹는 것을 보고 번개처럼 머릿속을 스치는 게 있었다.

깜상은 쓰레기로 버리는 뱀 껍질을 헐값으로 수입해 지갑을 만들었고, 뱀 가죽 지갑을 지니고 있으면 행운이 온다는 홍보 마케팅 전략을 썼다.

마케팅 전략은 맞아떨어졌고, 대박을 쳐 엄청난 수익을 올려 20층짜리 빌딩까지 올렸다.

금의환향한 깜상은 문득 초등학교 일학년 때 뱀 사건으로 기절까지 시켰던 은미가 생각났고, 강릉에서 중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하고 있는 은미를 만났다.

그런데 은미가 너무나 이쁘고 섹시하게 변해 있어 자신을 성공하게 해준 뱀과의 인연을 강조하며, 뱀띠인 우리끼리 결혼하자고 졸랐다고 했다.

끈질긴 구애 끝에 결혼하고 낳은 아들이 또 뱀띠였는데, 태몽도 커다란 구렁이가 은미의 가슴으로 파고드는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어머, 너 오팔봉 맞지?"
방 안에 들어서던 차은미는 나를 알아보고 깜짝 놀라며 반가워했다.

4. 뱀 가죽 핸드백

초등학교 졸업 이후 처음으로 만나는 은미였다.
그런데 순간 내 시선은 은미가 들고 있는 핸드백에 꽂혔다.

핸드백의 문양을 보니 그것은 분명 뱀가죽으로 만든 것이었다. 나는 은미의 얼굴과 핸드백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내 시선을 의식한 은미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어때, 핸드백 이쁘지?"
나는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초등학교 일학년 때, 그날의 사건 이후 뱀이라면 경기를 일으키며 다리야 나 살려라 도망치던 은미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뱀가죽 핸드백이라니?.

"지금은 이 사람이 나보다도 뱀을 더 좋아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뱀이라기보다는 뱀가죽을 더 좋아하는 거지. 뱀가죽 때문에 부자가 됐으니까."

그때 은미가 핸드백 속에서 뱀가죽 지갑 두 개를 꺼내 내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팔봉이 네가 온다기에 주려고 일부러 가져왔다. 한 개는 니 와이프 줘라. 엄청 좋아할 걸. 비싸거든."

소설가 이영철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소설가협회 이사

제6회 한국문협작가상 수상 〈성불〉

제38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

〈이 비가 그치면〉

장편소설 〈청어와 삐삐꽃〉(전2권)

〈비 오는 날의 쇼팽〉(전3권)

〈더블클릭〉(전2권)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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