廣大無量한 樂園世界의 建設 3

사물을 객관적으로 비춰 볼 줄 아는 능력을 이성이라 치면, 자신으로부터 끓어오르는 감정을 알맞게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일러 제대로 갖춘 감성이라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이 사물을 두고 생각한다는 자체가 일단 감성으로 느끼고 이성으로 판단 내지는 저장하는 일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객관성을 잃으며, 왜 조용해야 할 감정이 자꾸 들끓어 오르는 것인가?

자신의 입장만을 고집한 나머지 남을 배려하지 못하기 때문에 심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고, 또 남의 염병보다는 자신의 고뿔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놓지 못하기에 감성이 제대로 작동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자아에만 묶여 넓고 큰 즐거운 세상을 세울 줄 모르고, 감정의 노예에서 벗어날 때가 없기로 언제나 닥치는 일을 모두가 못 마땅한 것으로만 여기는 습관에 젖어 있기 때문에 한량없는 즐거움을 맛보기도 어려운 것이다.

이 세상의 중심은 비록 '나'이기는 하나 나 밖의 모든 사물들은 내가 나를 아껴야 할만한 가치가 있는 만큼, 그 모든 것들도 다 제 나름대로 아름다운 가치가 있다. 이러한 사실을 깊이 깨닫고 이를 경건하게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못하고 내가 나만을 위한다거나 내 감정만을 귀중하게 여기는 못된 습관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내 중심 깊숙이 들어 있으면서 항상 내 앞에 닥치는 사물을 볼 때마다 맑은 거울이 되어야 할 본성이 내 마음 밖으로 외출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급기야 내 안의 주인공을 잃은 나머지 나는 빈껍데기로 굴러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뜻에서 성낸다는 말은 참으로 훌륭한 말이다. 왜냐하면 내 본성이 사물을 쫓아 달아나 사물의 노예가 되었다는 말이 된다.

곧 '본성이 나가 사물의 노예가 됐다'는 말로 '心'(마음 심)에 '奴'(노예 노)를 붙인 것이 분명하다.

또한 '본성이 나갔다'는 뜻으로 '성내다'라 말한 것이다. 이에 비하여 참는다는 말은 여간 훌륭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아무리 고통스런 환경에 처했을지라도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참'인가를 부지런히 찾는다는 말의 뜻을 가지고 있다. 곧 '참을 찾는다' 즉 '참는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로 성인의 본디 뜻은 그 어떤 고통 속에서도 참을 잃지 않고 찾아야 한다는데 있다.
즉 '일시적 어려움을 참고 참으면 넓고 큰 즐거움이 있음(忍苦成樂)'을 들어 보이신 것이다.

<문역연구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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