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적 종교의 신앙을 하고 사실적 도덕의 훈련을 하면 정말 행복할까. 원불교에선 행복을 개교의 동기로 여기는 만큼 사회의 어떤 사람이나 집단보다 행복해야 함이 당연하다.

원불교의 집행부나 권력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이 아닌, 권력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시골이나 작은 교당에 사는 교무님들이 행복할까. 행복하다면 어떤 행복을 느끼고 있을까. 교무님들이 일상에서 신앙과 수행을 하며 행복하다면 원불교는 살아있는 교단이고 교화는 저절로 된다. 만약 이들이 행복하지 않으면 원불교는 교화보다 내실을 다지는데 더 많은 공력을 들여야 한다.

신앙과 수행없이 권력의 향유와 교화의 성과 그리고 취미생활에 의해 행복하다면 이는 조건에 의한 행복이라 죽음에 이르러서 훅 불면 다 날아가서 빈 껍질만 남는다. 깊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행복이라야 이생과 내생을 넘나들어도 한결같다.

서울의 지식인들과 공부해보면 참 많이 알고 있음을 느낀다. 한국의 최고 일류대 교수인 교도가 강연하는 내용을 보면 원불교 자료를 수집해서 하나의 논문을 만들고 삶에서 풀어내는데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들이 교무들에게 묻는 질문에서 원불교의 방향이 보인다. 무엇을 아느냐를 묻지 않고, 요즘 수행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하루에 어느 정도 하는지를 묻는다. 수행을 진정으로 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대답과 그 눈빛을 본다. 까닭 있는 수행을 하기에 가능한 질문과 시선이다. 이들에게 통할 수 있는 수행자가 시대를 향도할 수 있다. 원불교 인재양성의 방향과 과제이기도 하다.

앞으로의 수행은 그 사람의 음성, 눈빛 그리고 문고리 잡는 모습 하나와 일을 풀어가는 모습에서 그 수행과 인품의 면모를 읽을 수 있다. 그 정점에 이르는 길은 무시선(無時禪)으로 깨어난 면밀한 수행의 결과라야 한다.

원불교는 그동안 수행의 결과물로 사업의 업적을 얼마만큼 이루었는가에 많은 무게 중심을 두었다. 교단의 여건이 채 갖춰지지 않은 초창기에는 교단 발전의 흐름에서 어느 정도의 설득력으로 무리하게 추진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교단의 기틀이 어느 정도 자리해가는 즈음에서는 도와 덕으로써 일을 해가야 한다. 일에 재능이 있어서 일을 잘하는 경우와, 수행과 전문적 배움이 부족한 상태에서의 다행스럽게 이룬 일의 성과에 공부의 잣대를 대기에는 미흡한 면이 많다.

시대가 열릴수록 과정과 결과를 같이 보듯 수행의 관점에서 도로써 일하고 덕으로 나타남을 입체적으로 보아야 한다.

신앙과 훈련이 삶 속에서 밥 먹고, 일하고, 놀고, 잠자는 데에 자연스럽게 담겨있는 교단이 좋다. 그리고 인품의 향기를 지닌 어른이 많아, 잠자리에 들어서도 행복한 미소를 머금는다.

<삼동연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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