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적 적소는 신이 정해준 자리

▲ 황대권 씨.
원불교환경연대에서 주최한 원-에코(WON-ECO)이야기콘서트에서 생태주의자 황대권 씨가 '고맙다 잡초야'란 주제로 특강을 했다. 지난해 11월23일 원불교역사박물관에서 진행된 특강에서 그는 "죽을 때까지 생태적 적소를 찾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태어난 이유이다"며 "생태 적소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졌다.

강정마을에서 아들과 만남

내가 감옥에서 산 만큼 출소해서 세월이 흘렀다. 13년 2개월을 옥에서 살았는데 30살에 들어가서 44살에 나왔다. 나에게는 아들이 한 명이 있다. 아들은 내가 감옥 들어가기 한달 전에 태어났고 길러준 아버지가 따로 있다. 아들이 성인이 돼서 나를 찾아왔다. 나하고는 굉장히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녀석이 하는 행동을 옆에서 보니 피는 못 속이는 지 꼭 내 20대와 비슷했다. 굉장히 반체제적이면서 세속적으로 출세하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고 좀 자유분방했다.

그동안 한 번도 아들과 손잡고 시간을 보낸 적이 없었다. 그러다 지난 여름에 제주 강정마을에서 생명평화대행진이라는 것을 1주일간 했는데 거기서 아들을 만났다. 만나서 일주일동안 아들하고 생전 처음으로 손잡고 걸었다. 나에게는 그 행진이 참으로 뜻깊은 행진이었다. 잃어버렸던 아들을 다시 찾는 그런 행진이었다.

그때 나는 아들이 자기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아들과 대화를 잘 하는 사람한테 넌지시 물어봤다. 그 분은 "아들이 '우리 아버지는 50년 후를 대비하면서 사는 사람이다'고 표현했다"고 일러줬다. 그래서 나는"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말했다.

생명평화 세계관 형성

대개 무엇을 대비하면서 산다고 하면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희생하며 사는 사람으로 생각하기 쉽다. 많은 사람들이 제가 살아온 것을 보고 다들 그렇게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나는 현재를 희생한 적이 없다.

예를들면 내가 감옥살이를 오래하고 나와서 제일 많이 들었던 질문이 "청춘을 몽땅 감옥에다 바쳤는데 그렇게 헛 되이 산 것에 대해서 억울하지 않느냐?"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만약에 세속적인 출세나 어떤 지위에 올라가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면 그 말이 맞다 .또 내 삶이 그렇게 된 것에 대해 억울하다고 말한다면 그야말로 내 인생이 얼마나 억울하고 비참하겠는가? 그런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 심지어 많은 사람들이 "당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죄목을 부쳐가지고 당신을 고문해서 감옥에 처넣은 사람이 원망스럽지 않는가?"라는 질문도 많이 받았다. 그런 원망은 거짓말 안 보태서 손톱만큼도 없다. 감옥에서 나는 다 해소하고 나왔다. 해소하고 나왔을 뿐 아니라 감옥생활을 진심으로 즐기면서 지냈다. 그 기간이 미래를 대비하는 기간이 아니라 감옥에 있는 동안 자신을 실현하는 시간으로 만들려고 노력하면서 살았다. 그 결과가 〈야생초 편지〉라는 책이다.

원래부터 내가 그렇게 살자고 했던 것은 아니다. 잘 나가던 대한민국 최고 엘리트가 미국유학을 갔다가 어느날 갑자기 안기부에 붙들려 갔고 갖은 고문 끝에 간첩이 돼서 무기수생활을 하게 됐다. 얼마나 억울했겠는가? 당시 내 운명은 이게 아닌데 왜 이렇게 됐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것을 받아들이기까지 정확히 5년이 걸렸다. 만약에 징역을 3,4년을 살고 나왔으면 그저 그런 대한민국에 비판적인 지식인으로 살았을 것이다. 그 5년이란 기간동안 엄청난 저항을 했다. 단식투쟁을 시작으로 해서 별 미친 짓을 다했다. 결과는 결국 나 자신이 망가지는 것 밖에 없었다. 그러던 끝에 생각을 다시 했다. 내 삶이 원래 이런 것이였다면 이것이 내 운명이라면 내가 이것을 거부하는 것은 헛된 짓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이것이 내 삶이고 내 운명이다'고 전적으로 받아들이니까 그때부터 마음에 평화가 오고 새로운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 계기가 됐던 것이 야생초였다. 풀이였다. 풀을 관심이 있어서 접근한 게 아니다. 감옥에서 그렇게 몸부림치다가 온몸이 망가졌다. 모든 희망은 사라지고 '여기서 죽지 말고 살아나가야 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을 때 풀이 눈에 들어왔다. 자연의학을 공부하다보니 풀에는 온갖 약초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풀을 뜯어 먹으면 내가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때부터 보이는 풀은 다 뜯어 먹었다. 감옥운동장은 풀이 얼마나지 않아 화단을 만들어서 풀을 기르면서 풀과 함께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거기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 물론 지내 놓고 보니 기적이라고 하지만 그때 전혀 몰랐다. 그 안에서 풀을 보면서 생명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풀과 함께 풀 속에서 사는 작은 벌레들, 내 방안에 들어오는 작은 파리, 모기, 거미 이런 것들을 보면서 나와 똑 같은 생명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세상을 생명중심으로 바라보는 세계관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책을 보고 생태주의자가 된 것이 아니고 어떻게 보면 내 몸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생태주의자가 된 사람일 것이다.

생명이 사는 목적

생명이 사는 목적이 있을까?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이 만들었다. 하느님께서 살라고 명령했다. 그렇기 때문에 고귀하다'고 말한다. 듣고서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조물주가 있다고 치자. 조물주가 엄청나게 많은 생명을 만들어 냈다. 성경에 보면 7일만에 무수한 생명을 만들고 마지막에 인간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무수한 생명들이 제가 살겠다고 지구라는 한 생명공간에서 몸부림친다면 아마 지구는 난장판이 됐을것이다. 그런데 지구는 수십억년간 지구 생태계가 조화스럽게 잘 유지돼 왔던 것이다. 그 비결이 무엇일까? 조물주가 생명들사이에 딱 하나의 법칙을 심어놓고 사라졌다. 그 하나의 법칙 때문에 지구상에 평화가 유지되고 있다. 그 하나의 법칙이 무엇이겠는가?

그 하나의 법칙은 다른 생명의 먹이감을 내 몸에 심어놓고 조물주는 사라졌다는 것이다. 딱 이 한 가지 사실에 의해서 지구상의 평화가 유지가 되는 것이다. 생태학으로 말하면 먹이사슬의 법칙이다. 작은 물고기는 큰 물고기가 먹고 큰 물고기는 더 큰 물고기가 먹고 이런 식으로 다른 생명을 먹음으로써 생태계가 유지되는 절대법칙이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내가 태어난 목적은 다른 생명에게 먹히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다.

생명은 태어나고 다른 생명에게 먹히면 그것이 죽음이다. 이 탄생과 죽음사이에 삶이 무엇이냐 하며는 다른 생명에게 먹히지 않을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그게 삶이다. 그런데 그냥 적당히 안 먹힐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고 최대한으로 안 먹힐려고 한다. 그러나 결국은 먹히고 만다. 먹이사슬이 끊어지면 생태계가 무너진다. 누군가한테 먹혀야 이 먹이사슬이 계속 돌아가게 된다. 우리 인간은 무엇에 먹힐까? 인간은 세균에게 먹힌다. 병이든다는 건 세균한테 감염이 돼 있다는 뜻이다. 결국 인간도 누군가에게 먹히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다만 살아있는 동안 먹히지 않을려고 몸부림친다는 것이다. 이것을 생태학적으로 본다면 어떠한 생명이든지 먹히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바로 자신의 생명력이 최상의 상태가 유지되도록 노력 한다는 것이다. 그 최상의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자리가 있다.

생태적 적소의 발견

동물들이 사는 것을 가만히 보면 동물들은 우리를 만드는데 가장 유리한 자리, 가장 안전한 자리에 우리를 만든다. 사냥을 할 때도 가장 유리한 위치에서 길목을 지키고 있는다. 그 자리가 자기 생명력을 최대로 보존하고 발휘할 수 있는 자리이다.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그 자리를 찾아간다. 이것을 생태학에서는 생태적 적소(適所)라고 한다. 이것을 영어로 니치(niche)라고 한다. 니치는 모든 생물들이 자기한테 가장 유리한 장소를 찾아가는 것을 말한다. 앞으로 21세기에 가장 중요한 단어가 바로 니치라는 말일 것이다. 도대체 이 니치가 무엇인가? 생태 적소가 무엇이냐를 화두로 죽을 때까지 생각해 보기 바란다.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찾아 가는 게 우리들이 태어난 이유이다.

나는 감옥안에서 세례를 받은 천주교신자이다. 영성이다 뭐다 하면서 공부를 나름대로 했다. 그런데 그것을 가장 마음에 와 닿게 깨우친 게 생태학을 공부하면서였다. 바로 니치를 획득하는 그 순간이 바로 영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감이 이렇게 말씀드린다. 그 자리는 어떻게 보면 신이 정한 자리다. 왜냐하면 신은 이 세상만물이 가장 완벽한 형태로 있기를 바라는 분이라고 할 때 신은 모든 존재들이 가장 적합한 자리에 위치해 있도록 조절한다. 그 자리를 찾아가면 성공한 인생이고 찾아가지 못하면 실패한 인생이다.

난 이것을 내가 사는 농장에서 발견했다. 어느날 밭일을 하고 몸을 좀 쉴려고 관목이 우거진 나무숲 아래에 드러누웠다. 누워서 나뭇가지를 한참 쳐다보다가 놀랍게도 그렇게 복잡하게 얼킨 나뭇가지가 하나도 겹쳐져 있는 것이 없음을 발견했다. 그때 '아 이것이구나'하는 느낌이 들었다. 신께서 정한 자리를 나뭇가지들이 정확히 찾아갔던 것이다. 자기가 가장 잘 살 수 있는 공간을 찾아간 것이다. 그 자리를 못 찾아간 나뭇가지는 말라 죽는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그 자리를 찾아가야 행복하고 삶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세상사 다 똑 같다. 바로 신이 정한 자리를 찾아 가는 것이 인생의 목표이고 그 자리에 있을 때만이 가장 행복하다. 그러나 모든 생명 중에서 오직 인간만이 이 자리를 제대로 찾아가지 못한다. 다른 생명들은 거의 본능적으로 그 자리를 찾아가는데 인간만이 에고라고 할까 욕망으로 인해서 그 자리를 찾아가지 못한다. 욕망에 끌려서 10명에 9명은 그 자리를 찾아가지 못한다.

나의 슬로건은 '세상의 평화를 원한다면 내가 먼저 평화가 되자'이다. 세상은 내가 변화만큼 변화한다. 자기는 하나도 안변화고 상대방 보고 100날 변화하라고 소리쳐 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되도록 길거리에서 싸움을 하는 방식보다는 자기 자신의 평화와 안정, 수행을 중심을 둔 사회평화운동을 하게 됐다. 이것이 결국 쉽지 않다. 혼자서 수행하는 건 아무 문제가 없는데 이것을 사회적으로 확산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 첫 무대가 제주 강정해군기지 마을이었다.

이번에 영광핵발전소와 부딪치면서 또 본의 아니게 공동의장이란 타이틀을 갖게 됐다. 엄청난 고민을 했다. 나는 무엇을 반대하는 싸움을 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이것은 명백히 반대해야 되는 싸움에 앞장을 서게 된 것이다. 매일 고민을 하고 기도를 한다. 어떻게 이 문제를 생명평화적으로 풀어갈 것인가? 평생의 화두일 것이다. 신이 나한테 정해준 자리가 어디인가 그 자리를 찾아가는 여정이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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