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대종사께서는 최고의 수행자이다. 수행자는 진리를 보고 체험해서 세상 사람들이 보감 삼아 진리답게 살아가는데 관심이 있다.

소태산대종사께서 깨닫고 앞으로의 장구한 세월을 이끌어갈 새 법을 내놓으려 할 때, 이미 많은 선각자가 다녀가며 많은 법문과 수행의 길을 내놓았다. 새 법에 필요한 진리 인식과 수행에 도움이 된다면 굳이 생문자를 만들지 않고 선각자에 의한 보편적인 언어를 그대로 선용했다. 그래야 대중이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진리 인식과 수행에 의한 표현이 마땅하지 않을 때에만 창조적인 글을 썼다.

소태산대종사께서 명예욕이 있었다면 기존의 좋은 말이라도 애써 외면하고 생문자를 만들어 썼을 것이다. 원불교 정체성에서도 새 불교라 하지 않고 독창적인 특성을 내세운 또 하나의 종교로 만들었을 법하다.

소태산대종사께서는 대중이 진리를 이해하고 생활 속에서 수행을 할 수 있다면 언어도 종교도 별 의미가 없어보였다. 언어 이전에 진리를 신앙하고 사실적인 도덕훈련을 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지금은 틀이 정해져서 불법연구회가 아닌 원불교라는 교명을 가졌고, 한국의 4대 종교로서 세계적으로도 발판이 넓어졌다.

원불교가 세계적인 종교로 자리매김을 할지라도 교조의 본의를 망각해서 앞의 종교를 외면하고 대립각을 세워서는 안되는 이유다.

수행자는 어느 종교의 자료를 수집하고 비교 분석해서, 새로운 체계를 세우는 식의 진리관과 수행서를 만들지 않는다. 진리와의 교감과 자신이 소화해낸 진리를, 시대에 따른 대중의 인지를 고려하여 생활 속에서 체득할 수 있도록 고민을 할 뿐이다. 즉 진리가 수행자의 마음속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원불교 교리의 요체는 사은 사요와 삼학 팔조이지만, 축약하면 사은과 삼학이다. 사은과 삼학의 근거는 사실 과거불가나 어느 종교의 것이 아니다. 진리의 속성이자 최고의 영적 존재가 지닌 덕목이라, 최고의 수행자라 한다면 말은 조금 달라도 그 의미가 모두 같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원불교의 교리는 절대성을 지닌다.

사은과 삼학을 공부하면 포용력, 안정감, 통찰력, 정성심이 내면 깊이 자리해서 품다 나오기 마련이다. 이 네 가지로 수행의 척도로 삼아도 무방하다고 보는데, 이는 생활과 일을 통할 때 여실해진다. 앞으로는 인지가 점점 열려가면서 일반 사람도 알게 된다.

영적인 수행자는 이 세상의 삶과 일에 목적을 두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세상은 너른 세상 가운데 거쳐 가는 작은 일부이자 영적 자유를 얻기 위한 수행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세상이 자유를 향한 진급에 중요하고 함축된 길이자, 하나의 여행지로도 의미를 지니기에, 그 의미에 소홀하거나 정성스러움을 놓지 않는다.

<삼동연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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