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강령은 교단의 네가지 큰 목표다

▲ 조법전 교무 / 경기인천교구 용인교당
"사대 강령은 곧 정각 정행(正覺正行)·지은 보은(知恩報恩)· 불법 활용(佛法活用)·무아 봉공(無我奉公)이니, 정각 정행은 일원의 진리 곧 불조 정전(正傳)의 심인을 오득(悟得)하여 그 진리를 체받아서 안·이·비·설·신·의 육근을 작용할 때에 불편 불의(不偏不倚)하고 과불급(過不及)이 없는 원만행을 하자는 것이며, 지은 보은은 우리가 천지와 부모와 동포와 법률에서 은혜 입은 내역을 깊이 느끼고 알아서 그 피은의 도를 체받아 보은행을 하는 동시에, 원망할 일이 있더라도 먼저 모든 은혜의 소종래를 발견하여 원망할 일을 감사함으로써 그 은혜를 보답하자는 것이며, 불법 활용은 재래와 같이 불제자로서 불법에 끌려 세상 일을 못할 것이 아니라 불제자가 됨으로써 세상 일을 더 잘하자는 것이니, 다시 말하면 불제자가 됨으로써 세상에 무용한 사람이 될 것이 아니라 그 불법을 활용함으로써 개인·가정·사회·국가에 도움을 주는 유용한 사람이 되자는 것이며, 무아 봉공은 개인이나 자기 가족만을 위하려는 사상과 자유 방종하는 행동을 버리고, 오직 이타적 대승행으로써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데 성심 성의를 다 하자는 것이니라." 〈정전〉 제2 교의편

〈정전〉 사대강령을 보면서 느낀점 몇가지를 말씀드릴까 합니다.

첫째, 사대강령의 총체적 의미입니다.

교전의 교리도를 보면 거북이모양으로 되어있고 사대강령은 이러한 거북이의 네발에 해당하는 모습으로 정각정행, 지은보은, 불법활용, 무아봉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원불교의 교리를 이야기할 때 삼학팔조, 사은사요라는것은 상식적인 사실인데 사대강령 역시 삼학팔조, 사은사요를 벗어나지 않고 있어 중복적인 느낌을 받습니다. 왜 똑같은 말씀을 또 하셨을까? 그런 의문을 갖고 다시보니 팔만대장경같은 수 많은 불법을 사대강령으로써 교리의 바다에 헤매지 않게 표준잡아주신 자비의 이정표라 느껴졌습니다. 행여라도 교리가 어렵게 느껴진다면 사대강령으로써 공부를 다시 추어잡으면 핵심을 놓치지 않는 균형잡힌 교리공부가 되리라 확신합니다.

불제자, 세상 유용한 사람 추구

사상과 방종 버리고, 이타적 대승행

둘째, 정각정행의 표준이 불조정전의 심인오득이란 표현에서 이는 성리에 토가 떨어져야한다는 말씀임을 느껴보았습니다.

원불교 신앙수행의 대상이 일원상일진대 정각정행이란 일원상을 정각하고 일원상을 정행하란 말씀이니 이는 일원상을 통째로 삼키라는 말씀이고 더더욱 안이비설신의 육근작용시에 과불급이 없는 원만행을 하자는 말씀은 진리를 몰라도 성리를 몰라도 안이비설신의라는 용(用)자리에서 희노애락과 원근친소에 끌림이 없는 지공무사한 행을 할 수 있는 체용(體用)관통의 공부표준을 손에 쥐어주신것과 같다 할것입니다.

또한 대산종사께서는 정각정행=항마라 표준잡아주셨습니다. 생전에 대산종사를 모셨던 한 교무님이 여쭙기를 "결혼은 해야하는 것입니까" 답하시기를 "항마(=정행)를 못하면 해도 문제, 안해도 문제다"라고 하셨다합니다.

이렇게 정각정행은 결혼생활의 행복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으니 나머지 우리들의 일상사와 행복과는 얼마나 크고 깊은 관계가 있겠습니까, 관심을 갖고 연마할 일입니다

셋째, 대종사 삼타원 최도화선진께 물으시기를 무슨 공부표준을 갖고 있느냐는 말씀에 선진께서 감사생활로 공부표준을 삼고있다고 하시자 대종사께서 견성을 해야 변치않는 감사심이 나온다는 말씀을 하셨다는 일화를 접한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지은보은은 우리가 사은에 대한 은혜를 알고 보은감사생활을 해나가는데 있어 외형적으로 주고받는 상대적인 감사심이 아니라 진리자체를 은으로 보신 절대감사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발견하는 것은 요란함도 없고 어리석음도 없고 그름도 없는 절대심이 확보(=견성)될때 변치않는 감사심으로 이어지니 사은의 은혜를 안다는 것은 공부의 단계중 상당히 높은 단계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정산종사께서 "도통하면 일원을 알고, 법통하면 사은사요와 삼학 팔조를 안다" 고 하셨으니 지은보은을 통해 법을 가벼히 알아서는 안되겠다는 감상을 가져봅니다

넷째, 불법활용을 따로이 밝히신 이유입니다.

불법은 생멸없는 영생의 진리이며 제가 짓고 제가 받는 인과의 진리라고 대산종사께서 밝혀주셨습니다. 또한 대종사께서 "견성을 하여도 그 성품 자리를 떡 주무르듯 능숙하게 되기 전에는 인과의 원리를 투철히 알기가 어려운 것이다"라고 하셨기에 정각정행은 견성, 항마정도의 수준이라면 불법활용은 정각정행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인과의 이치를 천명함으로써 우리들이 쉽게 가늠잡기 어려운 불법의 핵심을 한번 더 강령적으로 남녀노소 누구든지 잊을래야 잊을 수 없고 놓칠래야 놓칠 수 없도록 목표 제시를 해주셨다는 점 입니다.

다섯째, 무아봉공을 통해 무아무불아라는 성리의 완결판을 보는것 같습니다.

무아는 우리본연의 성품이자 법신불사은님 전체가 하나인 대아입니다. 봉공이란 내가 없는 상없는 마음으로 공(公)이라는 전체를 위하여 성심성의를 다하자는 말씀이니 안으로는 무아의 진리에 합일하고 밖으로는 세상에 유용한 종교가 되자는 교단의 목표를 극명하게 보여주신 강령이라 생각됩니다. 다시말해 무아봉공은 재가출가를 초월하여 원만평등한 세계건설을 위한 종교 존재의 이유요 책임과 의무입니다.

스타킹이란 TV프로를 보면 어려서부터 춤, 노래, 개인기등을 가지고 타고난 끼를 보여주는데 얼마나 잘하는지 출연자들의 전생사가 짐작이 될 때가 있습니다.

또 작년에 교구에서 합창연습을 하였는데 지도 선생님이 어려서 피아노를 알기전부터 꿈속에 피아노 꿈을 꾸곤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잘한다는 것은 그만큼 오랜시간에 걸쳐 습득이 되어야하고 반복이 되어야 빛을 발합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사대강령이라는 교리에 믿음을 갖고 신념화하여 뇌수에 반복저장을 합니다. 노래를 잘하는 사람은 영생에 그 길로 가기가 쉬운 것이고 무아봉공을 가슴 속에 품고 살면 그런 영생을 살게되는 것은 안봐도 자명한 이치입니다. 일생이 곧 영생으로 이어지는 인과의 이치를 볼때 사대강령은 너무나 소중한 영생의 성업임을 느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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