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 안 되면 똥 된다

▲ 김일덕 교무 / 원100성업회
아주 어릴 때 할아버지(대산종사님)를 뵙는 시간은 제한적이었다. 주로 일년에 두 번있는 가족 합동제사와 추석 이외에는 할아버지를 가족끼리 뵙는 일은 거의 없었던 기억이다. 어쩌다 원평에 할머니(의타원 이영훈 종사님)를 모시고 가도, 할아버지 옆에는 늘 다른 할머니(구타원 이공주 종사님)이 앉아계셨고, 우리 할머니는 구석에 앉아계시어 도대체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부부간이 맞으신가 하는 의구심이 들 때도 있었다.

할머니 열반후 어머니(신충선 정토)께서 할아버지 지압을 위해 오형근 도무와 함께 아침마다 가게 됐다. 어린 우리도 집에 있을 수 없어 별수 없이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서 할아버지께 가야만 했다. 처음에는 차안에서 잠자면서 할아버지께서 지압을 마치시고 산책하실 때 뒤를 따라만 다녔다. 새벽에 가운을 입으시고 양쪽 손을 잡으시고 걸으시는 것을 보면 참 신선 같았다. 그러다가 지압하시는 방에 들어가서 기다리게 됐다. 물론 경건히 앉아있어야 함이 옳겠지만, 워낙 따뜻한 방인지라 우리도 모르게 잠에 빠져들게 되고, 급기야 동생은 코를 골기도 했다. 보다못한 교무님들이 깨우려고 하면 "놔둬라 갸가 지금은 잘때다"라고 하시어 침 흘리고 자는데도 그대로 놔두신 모습이 생생하다.

초등학생 때이다. 한창 대종사탄생백주년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에 조실에 가니 '교단 100주년 대적공실' 법문을 주셨다. 어린 마음에 나의 눈을 의심했다. '탄생백주년이 아니라 원기100년이라고? 아직 20년도 훨씬 더 남은 원불교100주년을 준비하라고 주신 법문이 의아했다. 이제 아득하게만 느껴졌던 원불교100주년이 가까워진 지금. 대적공실 의두를 나의 삶에 반조해 본다. 이 여섯가지 의두가 바로 여래행라고 하셨는데, 나의 심법과 행은 과연 얼마만큼 여래행을 하고 있는가? '100주년 이후에는 바빠지기에 그 전에 부지런히 공부해야 한다'고 하셨다는데, 나는 얼마나 무섭게 공부하고 있는가? 늘 대정진 대적공을 연거푸 이야기하셨던 기억이 난다. 뭐든 '대'자가 붙는 할아버지의 법문들. 그런데 언제부턴가 '대적공 대적공 하리로다'라는 법문을 '대적공 대적공 합시다'로 손수 고쳐서 읽으셨다. 이제는 위에서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성현의 가족으로 태어났다는 것도 지중한데, 거기에 가까이 자주 뵐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는 것에 나는 정말 전생에 엄청난 복을 지었던 사람인 것 같다. 대산종사님 법어집을 공부하면서 어릴 때 뵈었던 따스한 미소의 할아버지를 모시게 되고, 지극히 평범하셨던 대산종사님과 같은 여래의 삶을 살려면 이대로 살아야 한다 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 같아 가슴이 절절해 진다.

대산종사님은 평소에 필라 선학대학 이야기를 많이 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어린 마음에 '왜 할아버지는 부왕부왕한 말씀을 저렇게 하신담? '하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그 선학대학을 졸업하고 세계교화를 꿈꾸는 전무출신이 된 나의 모습을 보니 성현의 말씀은 호리도 틀림없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 말씀을 땅에 떨어트리지 않게 하는 것이 우리 제자들의 몫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엄마 뱃속에서 받은 법명 일덕. '딸이면 일덕으로, 아들이면 일도라 지으라'고 하셨다는데 왜 그러셨을까? 기원문 결어 법문을 봉독하시고 당신이 하신 법문임에도 반드시 합장하고 절하시던 모습. '주인돼야 한다. 주인 안되면 똥 된다'라고 하시던 모습. 그 생생한 성현의 모습을 떠올리며 '한 일 큰 덕' 이 촌스럽지만 큰 법명이 나의 삶의 방향과 지표이고 이 이름 따라 어디서든 늘 모시는 마음으로 대정진 대적공하면서 주인되어 대산종사님의 크신 은혜에 조금이나마 보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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