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고등종교는 출세간과 남성위주의 제도였다. 인지가 열려가는 시대에는 출가 재가와 남녀노소의 차별 없이 모두가 일상생활에서 수행할 수 있어야 하는데, 원불교에서는 1백여 년 전에 소태산께서 이 문을 열어놓으셨다.

원불교에서는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여기지만 지자본위(智者本位)라고 하여 지우(智愚) 차별만큼은 세워놓았다. 종교는 가치관의 집단이고 그 가치관은 영적 성장에 있기에 지우의 차별은 부득이 하다. 그러나 지자가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우자가 차별을 한다. 연조와 직책 또는 추천에 의해서 아닌, 진정한 사제관계는 제자가 스승을 정하여 배우기를 청할 때 성립되기 때문이다. 부자의 관계를 '내리 사랑'이라면 사제의 관계를 '위로 사랑'이라 부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요즘 한국 학교에서의 교사(敎師)는 말 그대로의 가르치는 스승이 아니라, 가르치는 기능인이 되고 말았다. 이는 학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즉 스승은 스승다워야 대접받는 세상이 됐다. 스승이라 할지라도 권위로 지시하고 제자라 하여 무조건 따르는 식의 사제 관계는 지나가고 있다. 가르치는 데에 있어서도 제자의 근기와 특성에 따라 도와주어야 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제도상 출가 재가가 평등하다고는 하나, 일에 따라 역할이 나누어진다. 출가 가운데 교화를 담당하는 교무들은 진리와 소태산 대종사의 전법사도의 임무를 부여 받은 봉사자인 동시에 전문수행자이다. 전문 수행을 하는 교무들은 깊은 수행으로써 사회에 샘물 같은 진리 소식을 시대와 사회의 인지에 한 발 앞서서 내놓고 이끌어가야 하고, 재가들은 삶 속에서 불법으로 생활하여 법에 생명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그러나 지도하고 받는 관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영적 성장이 궁극적 목적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진리의 심법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지자가 되는 셈이다.

교무에 대한 예우는 소태산대종사님에 대한 예우의 연장선이지, 교무 자신이 잘나서가 아니다. 재가교도를 지도 받는 위치에 있다고 하여 함부로 하거나 나이 많은 어른께 교무가 반말해서는 안 된다. 또한 어린 교무라고 하여 재가교도가 '○○교무'라고 자식이나 동생 대하듯 하는 것도 어울리지 않는다.

진리에 철든 사람은 법가지(法可止)를 할 줄 안다. 법가지는 법 앞에 가히 그칠 줄 안다는 뜻인데, 이것은 내가 법이 승해도 주법 앞에 자신을 내려놓고 주법의 일을 돕는다는 의미이다. 이는 함께하는 모든 일에 적용된다.

종교는 진리에 의한 수행자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지 무슨 명예와 권력을 지향하는 집단이 아니다.

원불교도 종교의 본질에 깨어있지 못할 경우 타락의 길을 걷게 되니 영성을 불러일으키는데 게으르지 않아야 한다.

<삼동연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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