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타원(先陀圓), 31년간 그림자처럼 교무와 하나된 삶

▲ 선타원 신현대 교도.
31년간 그림자처럼 박청수 원로교무를 따르며 헌신한 사람.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박 원로교무의 길벗이 되어줬고 정신, 육신, 물질을 아끼지 않았던 고(故)선타원 신현대 교도(이하 선타원). 그는 박 원로교무의 각종 원고를 정리해주는 것은 물론 세계 교화 활동을 사진으로 기록해 둔 장본인이다.

박 원로교무는 퇴임 후 활동사진들을 모아 '삶의 이야기가 있는 집' 박물관을 개관해 전시관에 그 자료들을 정리했다. 박 원로교무는 "선타원은 나의 분신이다"며 열반을 애도했다.

사)청수나눔실천회는 원기100년을 기념해 올해와 내년, 연원불지 인도델리에 8250㎡ 부지를 매입해 세계주세교단 건설에 박차를 가할 예정이다. 그중 대법당은 '선타원 신현대 대법당'이라 현판을 올릴 예정이다. 유족들의 염원인 것이다. 현재 강남에 위치한 사)청수눔실천회 사무실도 선타원의 부군(장근진 씨)이 마련해 준 공간이다.

인도에 건설될 다목적 건물은 대법당, 소태산교조관, 학교, 고아원, 노숙자 쉼터, 보경탑(寶經塔) 등이다. 설계도 마쳐 올 5월 착공 예정이다.

사진으로도 모든 기록 남겨

선타원은 강남교당 역사의 산증인이라 부르기도 한다. 투병 중에도 〈강남교당 30년사〉의 모든 역사적 자료를 정리했기 때문이다. 박 원로교무는 "선타원은 사무적인 일에 종사한 적이 없는데도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을 완벽하게 정리하곤 했다"고 회고했다. 묵묵하면서도 온갖 편의를 제공해준 선타원의 뒷바라지가 있었기에 박 원로교무는 모든 일을 온전하게 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선타원은 사진에도 특별한 감각을 지녔다. 청수나눔실천회가 이를 바탕으로 세계 55개국을 도운 현장화보집 〈THE MOTHER 박청수〉(2007년, 678p)을 출간했다. 이 외에도 '삶의 이야기가 있는 집'에 132권의 앨범으로 잘 보관돼 있다.

딸 장형선 교도(화가)는 "어머니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심미안을 가졌다.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치는 순간의 아름다움을 잘 잡아 내셨다"며 "어머니가 찍었던 사물, 풍경, 사람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졌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아들 장형택 교도(삼성전자 차장)는 "기회가 된다면 어머니의 사진전을 개최하고 싶다"는 소망도 밝혔다.

병마로 거듭난 삶

선타원은 매일 아침 교당 좌선에 참석했다. 좌선이 끝나면 1시간 정도 일을 하다 아침식사를 챙기기 위해 잠시 집으로 향했다. 서둘러 집안 일을 마치고 교당 생활을 하며 모든 일을 앞서 준비하곤 했다.

박 원로교무는 "나는 내가 가고 싶은 모든 곳을 선타원님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29년 간 다녔다. 교통비, 유류 값 계산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회고했다. 박 원로교무의 손이고 발이었던 셈이다. 선타원은 '수고한다'는 주위사람들의 인사에도 "제가 좋아서하는 일이다"며 치하하는 말 받기를 사양할 정도로 겸손했다. 선타원은 조용한 성품에 숨은 듯 뒤에 있었고 항상 남의 공을 드러내주며 자신은 겸손하고 상이 없었다. 그리고 가슴이 따뜻하여 선타원 품에 기대어 앞길을 열어가는 재가 출가들이 있었다.

맑은 정신으로 고개를 끄덕끄덕

선타원이 이렇듯 고요하고도 깊은 성품으로 거듭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39세 때 큰 병을 앓고부터다. 이후 64세 때 대장암에 걸려 투병 중 40일간 곡기를 못하고 주사에만 의존하기도 했다. 그 때도 많은 사람들은 회복할 수 없을 것이라 염려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병을 잊은 듯 독서삼매에 빠져 지내면서 무서운 병마의 터널을 빠져나와 새 생명을 얻었고 다시 열심히 일하고 또 세계 곳곳의 빈곤한 곳을 찾아 일손을 도왔다.

2011년 5월 선타원은 담도암에 걸린 것을 알게 됐다. 그때 의사들은 6개월간 생존할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그 6개월이 되던 2011년 10월 가을, 박 원로교무는 원다르마센터봉불식에 참석차 미국행을 택했다. 미국 내 교당 방문 중 아산병원 의료진들은 '1주일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고 통보를 해 박 원로교무는 소식을 받고 바로 귀국했다. 그러나 선타원은 그로부터 14개월을 더 생존했다.

선타원은 투병생활도 수도 정진하듯 했다. 병을 두려워하지 않고 누구나 다 아는 암의 무서운 통증도 입 밖으로 고통을 호소하지 않았다. 병문객들이 안타까워 위로하면 "다만 과정이겠지요"라고만 했다.

선타원은 집에서 투병생활을 했다. 장형선 교도는 "투병기간 중에도 교전을 읽으실 때는 늘 바른 자세였다. 시력이 나빠지고 몸을 가눌 수 없을 때도 교전을 읽어 드릴 땐 바른 자세로 고쳐 앉으셨다"며 "아픈 내색도 하지 않고 '고맙다'는 말씀을 가장 많이 하셨다"고 밝혔다.

열반 하루 전날인 지난해 12월10일 선타원은 "숨이 차서 힘들다. 병원으로 가자"고 말하며 스스로 아산병원 응급실로 갔다.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관장부터 했다. 그리고 의료진들은 "오늘밤을 넘기기 어렵다"고 했다.

관장 후 선타원은 눈도 못 뜨고 말도 할 수 없게 됐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다는 청각을 믿고 박 원로교무는 대화를 시도했다. "지금은 최후 청정일념이 매우 중요한 때이니 한마음을 잘 챙겨요."

선타원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다음 생에 와서도 성불제중 그 일 해야 되니 서원일념을 잘 챙겨요." 또 다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렇게 자신의 생이 완전히 소진될 때까지 맑은 정신으로 말하고 행동한 것이다.

박 원로교무는 다시 마지막 대화를 시도했다. "선타원님, 일원대도 회상에 큰 보살로 와서 지난 31년간 오직 나를 도왔어요. 정말 고마웠습니다."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응급실에 들어간 지 12시간 만에 열반했다. 자신의 에너지를 모두 소진하고 죽음의 언덕에 올라서듯 그렇게 열반한 것이다.

박 원로교무는 "선타원님은 20개월 투병기간 중에도 절도 있고 품위를 잃지 않았다. 죽음의 순간은 우아하기까지 했다"고 존경의 마음을 표현했다.

장형택 교도는 "'따뜻함과 현명함'은 어머니의 커다란 유산이다. 꼭 전하고픈 말이 있었다"며 "어머니의 사랑에 너무나 감사드리고, 해외근무로 인해 어머니 곁에 있지 못해 너무나 아쉬웠다"며 그동안 하지 못한 말을 전했다.

'다음 생에는 꼭 건강한 몸으로 태어나길 기도할게요. 그리고 어머님이 원하셨던 큰 일,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는 분이 되시길 평생 기원할게요. 너무나 그리워요. 어머니.'

경산종법사는 선타원 영전에 "해외 7개국 교당 설립지원과 국내외에 여러 교육기관 설립을 지원하는 등 수많은 대불사에 정신·육신·물질로 상없는 공덕을 쌓았다. 이 교법의 독실한 신봉자가 되시고 이 사업에 진실한 협력자가 되신 복덕은 영원하며 무량할 것이다"고 고인의 삶을 세세곡절 헤아리며 영로를 밝혔다.
▲ '선타원은 나의 분신이었다'고 열반을 애도한 박청수 원로교무(왼쪽)와 신현대 교도.
신현대 교도는

고(故) 신현대(선타원, 본명 훼재) 교도는 1943년 10월 전남 영암군 덕진면에서 출생, 1970년 27세에 장근진님과 결혼해 1남 1녀의 자녀를 뒀다.
온순하고 온화한 성품인 반면 한번 결심한 일은 반드시 이뤄내는 단호함과 강직함을 소유했다.

원불교와의 인연은 원기48년 모친 최기전화의 연원으로 이리교당에서 입교했다. 압구정교당을 다니다 강남교당으로 옮긴 후 단장, 주무, 교도부회장, 사)청수나눔실천회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박청수 원로교무와 세계 55개국의 빈곤한 지역에 물질·의료나눔, 교육기관 설립지원, 교당건축 지원 등 베품과 선행실천을 한 보좌불로 한마음 한 몸의 동행자이기도 했다.

병마와의 싸움은 39세부터였다. 자궁암, 대장암, 담도암 등을 이겨내고 공익사업에만 온 정열을 다 바쳤다. 원기97년 12월11일 오전8시20분 서울 아산병원에서 열반했다.

종재는 28일 오전10시30분. 강남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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