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구경북교구가 교구장 취임식 및 합동법회를 통해 소통 화합 정진하는 교구로 거듭나길 서원했다. 축하무대도 원울림 공연 등 다채롭게 열렸다.
교법의 총설에서는 광대하고 원만한 종교의 신자가 되자고 했다. 광대하고 원만한 종교의 신자인지. 아니면 광대하고 원만한, 종교의 신자인지 모호한 점도 있다. 그 동안의 원불교교법의 중론과 정서에서 보면, 원불교와 수행자 모두가 광대하고 원만하라는 아우른 뜻과 유연한 표현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이 말뜻만으로 교법의 방향을 잡기에는 왠지 답답한 느낌이다.

광대하고 원만하면 무엇이 좋을까. 이것은 개교의 동기를 기반하고 있기에 광대무량한 낙원 즉 모두가 길이 행복함을 바탕으로 삼는다. 교법의 총설은 이 행복을 위한 교법이라고 보면 좋을 듯싶다.

모두가 길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사람의 모습은 어떨까. 외면의 모습보다는 내면이 중요할 텐데, 분명한 것은 아름다운 인품을 지녔다. 일반인들이 받아들이는 그 아름다움은 다른 이들의 자유를 존중하는 동시에 그들의 부끄러운 부분을 알면서도 버리지 않으며, 지치고 외로워할 때면 품어서 키워주고 도와주는 인품을 지닌 사람을 말할 것이다. 또한 그 사람과 있으면 편안하고 싱그러우면서 세상의 소소한 것도 새롭고 아름답게 보인다. 그래서 마음의 에너지가 살아나고 가슴이 따뜻해진다. 어쩌면 교법을 들이대지 않아도 아름다운 인품인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아름다운 인품은 돈과 명예에서 보다는 여유로움을 기반해 온다. 이 여유로움 또한 진리와 삶을 달관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달관자는 이 세상이 진짜가 아니라 의미로 엮어진 세상임을 꿈과 세포 하나에서도 의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교법 또한 그 의식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기에 인생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나, 영성의 중요성과 삶의 의미에 있어서는 항상 깨어있다. 그래서 그 사람의 행위보다는 삶의 경험을 통해서 영성이 성장해 가는 것을 보기 때문에 사람을 미워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다만 불쌍하고 안 되게 보일 뿐이다.

자신이 바라보고 배려를 기대하는 이의 아름다운 인품은 보기 좋거나 닮고 싶은 대상이지 자기 자신이 아니다. 아름다운 인품은 진리에 의한 내면화와 삶속에서 단련해 갈 때 비로소 형성해 간다.

내 마음 속에 진리와 삶의 의미에 따른 모든 은혜에 감사의 마음을 품고, 진리의 비고 영롱함에 따른 균형과 조화로운 모습을 삶속에서 지니려는 노력에 의해서 형성된 인품은 참으로 아름답다. 이 수행법을 원불교에서는 사은 신앙과 삼학 수행법으로 교법의 요체로 밝혔다.

이 세상에는 삶을 예술처럼 사는 사람이 있다. 그 가운데에 아름다운 인품의 소유자는 예술의 극치를 보인다. 이런 사람과의 차 한 잔에서도 그 사람의 마음과 삶의 숨결을 느낄 수 있으니 행복하기 그지없다.

<삼동연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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