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연성 교도·상동교당(논설위원)
구정연휴가 끝났다.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고향집에 모여 같이 먹고 자고 놀았다. 설 전에는 준비해야 할 것이 심란하여 심신이 힘들었으나 다시 흩어지니 서운하기도하고 더 많은 음식을 해주고 더 많은 덕담으로 즐겁게 해줄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가족이 다 떠난 후 밤 뉴스에 서울의 어느 아파트에서 층간 소음으로 인한 살인사건과 방화사건을 봤다.

필자는 단독 주택에 거주하여 층간 소음으로 인한 고민은 없는데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꽤 심각한 것 같다. 혹자는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다'고까지 한다. 얼마 전 해외뉴스에서도 미국의 다세대주택 윗 층의 애완견 배설물 투하와 냄새와 소음등을 문제로 아래층 사람이 총기를 가지고 가 윗층 주인을 쏴 죽이는 살인사건 보도를 봤다.

쏜 사람이 한국인이고 죽은 사람은 미국인이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층간 소음문제와 위 아래층 사이의 갈등은 있는 모양이다. 왜 하필 참지 못하는 사람의 국적이 한국인일까?

우리 나라 총 가구의 60% 이상이 층간 소음을 안고 있는 다세대주택등 공동주택이다. 그렇다면 우리 국민의 대다수가 층간 소음의 고통을 경험하거나 참고 사는 사람들이다. 과학이 발달하여 우주도 정복하는 시대에, 공동주택을 건축하는 업자들은 왜 층간 소음을 해소하지 못하는 것인가? 아니면 안하는 것인가? 아마도 방법은 아는데 전문가집단의 층간 소음의 규정에 대한 견해차이와 업자들의 이해문제가 걸려있기도 할 것이다.

공동주택에 사는 한 너 나 할 것 없이 층간 소음문제의 가해자가 될 수 있고 피해자도 될 수 있다. 주거문화 연구소가 제시한 공동주택 자치규약을 제정하여 추진한 결과 바닥에 두꺼운 방음매트를 깔거나 가구 밑에 쿠션을 덧대는 등의 방법과 아파트 관리소장과 입주자대표회의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층간 소음 문제를 해결한 성공사례도 있다. 그 곳에 사는 한 배려심과 양보, 행동규약 제정 등으로 조금씩 이해하며 더불어 살면 될 것이다. 참고 사는 세대가 적어지고 참지 못하는 세대들이 증가함에 따라 층간 소음문제 제기는 앞으로 계속 될 것이다.

최근 재독 철학자 한병철 교수의 〈피로사회〉에서 읽은 대목이 가슴에 와 닿는다. "현대를 사는 특히 성과주의 사회에 사는 인간들은 자기착취로 인해 영혼이 다 소진된다"고 지적했다. "모든 공동체, 모든 공동의 삶, 모든 친밀함, 언어자체마저 파괴하여 폭력을 양성하고 사람을 고독하게하고 우울하게 만든다"는 진단과 "긍정성의 과잉이 영혼을 경색하게 만든다"는 지적에서 층간 소음을 못 참고 방화, 살인까지 한 현대인이 오버랩된다.

현대인들은 일상의 스트레스를 일단 참고 본다. 그러나 참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다. 참다보면 언젠가는 폭발한다. 참는 법도 공부해야 되지만 조절하고 푸는 법도 공부해야 한다. 스트레스나 갈등이 전부 역기능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약간의 스트레스나 갈등은 사람을 긴장하게 만들고 건강하게 한다는 의학적 보고도 있다. 인간은 홀로 사는 존재가 아닌 더불어 사는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일상을 살면서 팽팽한 스트레스를 이완시키는 공부와 타인과 이웃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해야할 것이다.

일찍이 대종사님께서는 사람으로 태어나 세상을 살면서 겪을 다양한 삶속에서 삼학을 통한 수행 공부길을 정신수양, 사리연구, 작업취사의 요지와 목적과 결과로 간결하게 밝혀주셨다.

예의 염치와 공정한 법칙을 무시하고 권리와 무력의 욕심으로 신경쇠약과 영혼이 경색된 현대인들, 일의 시비이해를 모르고 자행자지하는 현대인들, 실제 일을 당해 선은 취하고 악을 버리는 실행을 못하는 것은 온전한 삶이 아니다.

평소에 우리의 삶을 수양하고 연구하고 취사했더라면 가족이 다 모이는 즐거운 명절날 위 아래 층의 층간 소음으로 살인까지 하는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각박한 현실에 대종사님의 법 실행 수행공부가 더 절실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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