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께서는 깨치신 진리를 일원상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일원상이 무엇이냐를 일컫기 전에 소태산께서 깨치기까지 일련의 과정을 간략하게 짚어본다면 일원상의 진리에 대한 정서를 엿볼 수 있다. 깨치는데 무슨 정서가 있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깨달음의 경로도 여러 가지이고 정도의 차이도 여러 층을 이루기 때문이다.

좌선을 하면 대부분 정(定)에 드는 한 재가 수행자가, 며칠 전에 나직한 목소리로 묻는다. "영이 뜨려고 하는데 전에는 좀 불안하여 그만 두었지만 이제는 여행을 해보려고 합니다."

"정법을 모르고 하면 문제가 되지만, 알고 나서는 한번쯤 마음 내키는 대로 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별 거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마음먹은 대로 되고 어떤 때는 안 됩니다. 그 이유가 뭐죠?"
"잠재의식으로 자리할 때 됩니다."

깨달음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잠재의식으로 자리할 정도로 진정성 있고 간절해야 한다. 이 발원에 따라 깨달음의 방향과 크기와 깊이가 다르게 나타난다.

소태산께서는 어릴 적부터 천지자연과 사람들의 삶에 의구심을 지녔다가, 청년기에 이르러서는 '장차 이 일을 어찌할꼬'라는 의구심으로 변하여 지속했다. 수행의 측면에서 바라보면 기도와 화두로 일관된 수행이라 말할 수 있지만, 소태산으로서는 수행이란 단어가 사치스럽기까지 할 정도로 그저 치열한 몸부림이었을 뿐이었다.

소태산께서의 깨달음에는 삶이 들어있다. 진리로 삶을 읽어내는 것이 아니다. 삶에 따른 정서를 진리로 승화하여 영생으로 일관할 수 있게 했다.

고뇌에 찬 삶에서 진리성을 발견하고 마음공부로 영성을 진급케 함으로써, 진리의 힘을 얻고 합일하려는 염원을 지니기를 바랐다. 이것은 삶을 진리 수행의 중요한 과정으로 여김을 의미한다.

소태산께서는 곳곳이 부처이니(處處佛像) 그일 그 일에 불공(事事佛供)하고, 언제 어디서나 성품을 여의지 않으면서 마음을 다함으로써(無時禪 無處禪), 동정이 한결같은(動靜一如) 경지에 이르기를 바랐다. 그러면 영성이 진급되며, 심신이 건강하고 보람있는 삶(靈肉雙全)으로 행복하리라 여겼다.

이런 삶은 생활하며 마음을 닦고(生活是佛法) 마음공부로 생활(佛法是生活)하는 모습이다.
소태산께서 내놓은 일원상의 진리는 생활 속에 있고, 생활 속에서 힘을 얻는 것이 참다운 힘이라 보았다.

그러나 이 힘은 인간으로서 잘 사는 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품격으로 법계에 이르러서도 지고한 존재로 자유자재할 수 있는 바탕이기 때문이다.

<삼동연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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