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진리에 대해 상징적이고 아름다운 시로 표현하기도 했고, 역설적이거나 의인화하기도 했다. 하지만 산만하게 펼쳐진 내용으로 진리를 알기는 참으로 어려웠다. 학자들이 논리적으로 정리했어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진리를 소태산께서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고, 또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 일원상 진리이다.

입교하기 전부터 사람들의 기운을 잘 보는 사람이 전화를 해왔다. "교당에 가면 일원상이 있는데 중요한 것은 황금색 원이 아니라 텅 비어 있는 빈공간이지요. 그리고 원은 비움에서 반응하는 빛일 뿐이지요? 제 말이 맞지요? 제가 정에 들면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는데 그것을 정리하여 표현한 것 같아요." "다들 원을 진짜라고 보는데 교도님은 그 핵심을 보실 줄 아네요."

텅 비어 있으되 영롱함이 있고, 여기에서 무궁한 조화가 나타난다. 그 조화는 균형을 이루며 나타나는데 긴 호흡으로 보면 은혜의 굴레를 이룬다. 이것이 일원상이다. 모든 만물은 이로부터 나와서 이리로 돌아간다. 이러한 반복이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며 끊임없이 이루어지지만, 나타난 세상은 수많은 차원을 달리하며 다양하게 펼쳐졌다.

인간 세상에서 보편적으로 인식하는 세상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식의 차원에서 볼 수 있는 정도만 국한되어 있다.

인간이 인식하는 우주와 세상살이는 서로와 서로가 역할을 유기적으로 해가며 균형을 이루는데 그 법칙은 인과(因果)의 원리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것도 인간의 보편적 의식인 착심에 의해서 설명되지만, 한 단계 나와서 마음의 세계에서 살펴보면 내면의 깊은 의미에 의해서 근본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수행은 결국 세상으로부터의 관념을 벗어버리고 마음을 깊이 이해하는 데에서부터 비롯된다.

소태산께서 일원상을 사진이라고 표현한 것도 이런 맥락으로 이해한다. 사물을 그저 시간과 공간 그리고 빛을 이용하여 사진기로 찍어서 나타내는 것으로 여긴다면 이해의 편차가 커도 너무 크다. 일원상은 마음의 사진기로 찍어서 마음속에 현상하여 생활로 인화된다. 수행자라면 이 작품을 볼 수 있고 그 작품이 최고의 작품 세계라는 것을 안다.

일원상 또한 과거로부터 많은 수행자들에 의해 그려져 왔지만, 현존하는 수행자에 의해서도 여전히 진리의 상징으로는 이만한 것이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미래를 책임질 교단에서 진리의 표상이자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삼으려면 진리에 대해 확실히 꿰뚫은 깨달음의 안목 없이 쓰기에는 주저할 수밖에 없다.

진리에 대한 설명과 표현이 크게 깨달은 자에 의해 이제 정리가 되어 있으니, 자신이 안으로 궁구하고 밖으로 삶속에서 드리우는 일만 남았다.

<삼동연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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