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후쿠시마 원전과 한국의 영광 원전

▲ 8백여 년 전의 일본고전삼대수필 중 하나인 〈방장기〉가 3·11 일본동북부의 대지진 이후 다시 베스트셀러로 부각돼 여러 책자가 발행됐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원불교성지 인근의 영광 원자력 발전소를 되돌아보게 한다.

〈방장기〉에 기술된 대지진도 '쓰나미'였다

일본의 고전 삼대수필 중 하나인 〈방장기〉라는 책의 '대지진' 편을 보면 '무시무시한 대지진이 일어나 땅이 엄청나게 흔들린 적이 있었다. 산이 무너져 강을 메워 버리고, 바다가 기울어서 바닷물이 육지를 삼키고 말았다. 땅이 갈라져 그 사이로 물이 솟아오르고, 커다란 바위가 깨져 골짜기로 굴러 들어갔다. 해안 가까이 노 저어 가는 배는 세찬 파도의 노리개가 되고, 길을 가는 말들은 휘청거리며 발 디딜 곳을 찾지 못했다'라고 기술돼 있다.

이후의 내용을 극히 일부분만 소개하면 '이처럼 세차게 흔들리는 것은 잠시 후에 그쳤지만, 여진(餘震) 또한 자주 발생하는 게 예사롭지 않았다. …중략… 무릇 인간 세상이란 살아가기 어려운 곳이라, 자신의 몸뚱이 하나와 그 몸을 의탁해서 살아갈 집이 헛되고 덧없는 것은 지금까지 말한 여러 가지 재해로 생긴 것임을 나는 이제까지 말해 왔다. 하물며 인간이 처한 환경이나 신분의 귀천으로 마음을 괴롭히는 일은 또 얼마나 많으랴!'라는 내용이다.

2011년 3월 11일의 일본의 동북부 지역에서 일어난 대지진은 1995년의 '간사이 대지진' 이후 가장 컸다. 수직형 진도 7인 간사이 대지진을 포함하더라도 3·11대지진의 피해는 크기만 했다.

그것은 지진만으로 끝났더라면 사망자가 3~4배 많았을 뿐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소위 지진해일이라는 '쓰나미'가 뒤이어져 그 피해와 공포심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지난 2월에도 일본열도는 일본의 각종 TV에서 소개하는 뉴스 가운데 여전히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후유증에 관한 내용이 적잖았다. 물론 3·11대지진에 관해서는 하루에도 수 십 번 방영됐지만, 2년이 다 돼가던 그 때까지도 '후쿠시마 원전사고'에 대한 뉴스 방영은 계속됐다.
▲ 올해 2월 일본의 TV방송에서 방영한 '3·11 쓰나미'가 할퀴고 간 후쿠시마 현의 상흔.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통한 교훈

일본인들은 큰 지진으로 인해 '쓰나미'가 발생해도 대부분은 대체로 침착한 면도 있다. 그것은 어린 시절부터 익혀온 지진발생 때의 교육 내지 그들이 체감하고 있는 무상감이라는 인생관이 가슴 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쓰나미'가 일어난 무렵 TV에선 도쿄는 물론 요코하마의 교통망마저 두절될 것이라는 뉴스가 많았다.

이로 인해 수도권에서만 무려 9만 명이 졸지에 '퇴근 난민'이 됐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집에 빨리 도달하기 위한 것이 대표적이겠지만, 집에 도착한들 무슨 뾰족한 수도 없을 터였다. 그럼에도 일본에서의 사람들의 발걸음은 가족이나 친족의 안부를 전화로 묻기 위해, 서둘러 택시를 기다리기 위해,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 먹을 것이나 덮을 것 등 구호품을 받기 위해 마음은 무척 발걸음이 빨라졌었다. 이 때 '줄서기'는 가장 모범적인 행동으로서의 표본이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에 따라 훗날 물건은 동이 났지만 약탈은 없었던 점도 일본인의 모범행동으로 보였다.

3·11 동북부 대지진은 단지 '지진'으로서 끝나지 않았다. '쓰나미'가 곧바로 덮친 결과 목조건물은 눈 깜짝할 사이에 휘청거리는 배로 변했고, 그런 배들은 심지어 태평양으로 흘러가기도 했다. 더욱이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인해 원전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생명을 걸고 정상적으로 되돌리려 온갖 힘을 기울였지만, 사고는 여전히 사고로 남았고 사상자가 속출되기까지 했다.

결국 간 나오토 총리는 정전을 발표했고 국민의 불평이 하늘을 찌를 정도로 계속되자 총리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예상 밖으로 크게 작용됨은 일본열도 전역을 불안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에 충분했다. 이와 더불어 화력발전소 가동 중지로 전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일본정부는 간토지역을 몇 개 구역으로 나눠 3시간씩 돌아가면서 정전을 시도했다.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를 포함해 2만 명을 넘어섰고, 산 사람에게는 지진, 쓰나미, 원전사고, 정전사태, 머물 공간의 실종 등의 순으로 3·11 동북부 지역 대지진의 재해는 인간 어느 누구에게나 극도의 불안감과 공포심까지 갖게 했다. 그러기 때문에 당시의 재해는 자연재해를 넘어서 인간재해가 된 바, 그것은 다름아닌 '쓰나미'에 의한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귀결되어진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쓰나미'라는 인재를 겪었던 사람들의 정신적인 충격은 실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보였다.
▲ 올해 2월 일본의 TV방송에서 방영한 '3·11 쓰나미'가 할퀴고 간 후쿠시마 현의 상흔.

위험요소 더 큰 한국의 영광원전

3·11대지진 2주년을 1개월 앞두고 요코하마의 서점들의 입구에는 〈방장기〉의 후속편이 6~7 개소의 출판사에서 새롭게 발행됐다.

그책들의 겉표지에는 '8백년이나 지났지만 현재 되묻는 자연과 공생하는 독자의 사상이란?' 또는 '무상관의 가르침이야말로 오늘을 살아가는 힌트', '아비규환! 대지진', '800년을 거쳐 소생하는 〈방장기〉' 등의 표현이 생생했다.

2년이 경과됐지만, 이런 책들이 다시금 주목받는 것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일본인들이 '3·11쓰나미'가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는 강한 의식의 발로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일본인들은 '우리 일본은 괜찮다'며 자국을 믿었다. 그렇지만 그 믿음도 오래가지 못해 '믿음의 대상'이 일본 정부인지, 일본의 원전에 대한 기술력인지는 확실하지 않아 보였다.

후쿠시마 원전 사태를 비록 현지에서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일본인들이 상당수가 차츰 정부의 늦장 대응을 비난하기도 했다. 그 후 1년이 지나도 방사성에 대한 공포가 극도로 달하여짐에 따라 원전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 인해 가족들이 뿔뿔이 헤어지기도 했고, 유족들은 행방불명자들도 찾지 못한 채 '앞날이 캄캄해도 현지를 떠날 수도 없다'는 소식이 넘실거렸다.

게다가 후쿠시마 원전 인근 주민들은 "모른 척하고 우리를 죽여 가는 일"로 해석하기도 했다. 결국, 당시의 원전 사고는 일본열도 거의 전역에 공포심을 안겨줬고, 2년이 지나가고 있는 현 시점에서도 현지 사람들의 발목에 족쇄를 채워둔 셈이 됐으며 후쿠시마 현지만이 아니라 일본열도의 외국인들은 자국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여기에서, 우리 원불교인들은 무엇을 염두에 둬야 하는가에 관해 생각해 본다. 물론 3·11 재해 이후 집을 잃은 사람들을 위해 가설주택을 세우고, 위험하기만 한 후쿠시마 원전에 방사성에 강한 의복과 장비를 갖추고 근무하기도 했지만 일본열도의 사람들의 마음에 남아 있는 공포심을 없애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런 점을 거울삼아 볼 때, 영산성지 근거리에 영광핵발전소가 위치하고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이미 원불교 재가 출가교도들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 하고 있음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것은 영광원전이 오늘날 몇 차례의 고장이 이미 노출됐고, 그 만큼 위험요소가 크다는 점이 사실화되었기 때문에 '고뭉치 영광원전, 즉각 가동 중단'을 외치며 영광핵발전소안전성확보를 위한 원불교대책위가 생명과 평화를 모토로 세우고 시도하는 '탈핵 순례'야말로 시의적절한 일로 보인다.

또한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이 지난 1월 개최한 '탈핵선언 교수 신년세미나' 또한 그렇다. 그러므로 절대로 원불교성지가 위치한 영광원전에 대한 방심은 금물임을 확연하게 알아가자.

그것은 영광원전의 위험요소가 후쿠시마의 그것에 비해 결코 작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도 이웃종교 교역자들과 손에 손을 맞잡고 하는 일이라서 더욱 더 의의 있는 일이다.
▲ 조상원 / 원광보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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