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있게 하고 움직이는 존재를 진리라고 부른다. 그 진리는 어떤 모습으로 어디에서 어떻게 존재할까. 이 물음에 가슴 저미는 대답을 안고 사는 사람은 누구일까.

많은 사람들은 인생에 한번쯤은 자신에게 물음을 던지며 답을 얻으려고 고뇌에 찬 나날을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요즘 청소년들은 사춘기에 인생의 궁극적 질문보다 '어떻게 하면 근사하고 즐겁게 살 것인가?'를 일반적인 화두로 삼는 듯싶다. 그럼 요즘 아이들이 문제인가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지난날에는 먹고사는 것이 고되어서 삶의 회의에 의해 철학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러다가 먹고 사는 길이 보이자, 이내 철학적 고뇌를 삶속에 묻어버렸다. 결국에는 예나 지금이나 매마찬가지인 셈이다. 고뇌의 과정이 줄었을 뿐이다.

희유하지만 삶속에서 재색명리의 먹잇감에 속지 않고 꾸준히 진리를 벗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의 마음은 성속에 있지 않고, 지위 고하나 재산의 많고 적음에 있지도 않다, 또 외모의 미추에도 있지 않다. 일반인들은 기득권이 있든지 없든지 세상과 자신이 만들어 놓은 관념의 틀 속에서 사는 것을 편안하게 여기기 마련인데, 이들은 관념이 아닌 진리를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이다.

진리는 우주의 근원이자 움직이는 이치와 에너지이고 전체의 모습이지만, 우주 가운데 한 개체인 인간에게도 내재해 있기에 진리를 인간의 마음에 품는 것이 가능하다.

인간에게는 우주보다 자유의지가 더 있어서 오히려 우주를 활용할 수 있는 영적이고 존귀한 존재이다. 이는 몸을 지니고 있든 없든 우주에 자유로운 숨을 불어넣는 생생약동한 에너지이다.

사람이라는 한 동물로서의 호르몬과 착심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모자람을 생각하고 채우려는 욕망으로 윤회의 쳇바퀴에서 돌고 도는 것이 인간세상이다.

이런 인간의 굴레를 벗어나 진리와 벗하는 삶을 생각만 해도 뛰는 가슴에 귀 기울여 사는 사람은 참으로 드물다. 이런 사람은 세상과의 균형에 처음에는 힘들지만 진리가 깊어지면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의미를 더해간다. 영적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 작은 일 하나에도 여유와 깊은 까닭이 담겨있으니 어찌 존귀하다고 아니할 수 있을까.

"일원(一圓)은 우주만유의 본원이요, 제불제성(諸佛諸聖)의 심인(心印)이며 일체 중생의 본성이다."

일원 즉 진리인 나는 내면의 진리를 사랑하기에, 삶의 굴곡에서도 그대로 투영되어 진리로 드러남이 오늘 하루는 얼마만큼 있어졌을까? 도장을 찍은 것처럼 한결같지는 않더라도 그만큼이라도 진리를 품어 사는 것은 그만큼 아름다운 행복이다. 세상은 그를 그 만큼의 부처라고 부른다.

<삼동연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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