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역동성의 선(禪)

▲ 오선명 교무 / 경남교구 문산교당
한국의 명산 지리산에는 약 1천 5백 여 명의 도인들이 각자 나름대로 수행 정진을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많은 기인들이 세상과 거리를 두고 도를 닦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언론을 통해서 잘 알려진 분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 은둔과 칩거로 세상 밖에서 송풍나월과 더불어 살고 있습니다. 그분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저는 원불교의 무시선법이 대승선(大乘禪)이요, 삼학을 병진하는 공부법이라는 것을 더욱 실감하게 됩니다.

무시선법의 기본 원칙은 동정(動靜)과 처소(處所)에 구애 없는 생활 속의 선입니다. 동 할 때에 적절한 선, 정할 때 적절한 선, 동과 정에 적절한 선(禪)임과 함께 장소 또한 어느 곳이든 적절한 선을 하는 것이 무시선입니다. 곧 다양성과 역동성의 선법이 오늘날 원불교에서 그토록 내세워 강조할 수 있는 무시선법입니다.

그러나 무시선법은 이곳에서, 이 순간, 곧, 즉시, 지금이 숨 막힐 정도로 강조된 선법입니다. 64분의 1초의 찰나보다도 더 긴박한 시간적 틈새를 주지 않는 선이며, 우리의 육근이 접하는 모든 공간이 포함된 참선의 수도도량을 강조하는 선입니다. 재가 출가를 비롯하여 남녀노소가 누구든 수행할 수 있는 선법이지만 그 원리와 방법을 조금이라도 간과하면 소태산대종사께서 경계하셨던 무정물과 같은 선, 무용한 병신을 만드는 일에 벗어나지 못합니다. 평생을 수도하였다는 수행자가, 평생을 신앙과 수행을 온 정성 다해 살아왔다는 분들이 혹 자신의 삶을 후회하고 때로는 품위와 인격에 적절하지 않는 언행을 함부로 할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지탄을 받고 공익에 손해를 주며 세상에 공적을 남기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이 그 증거입니다.

반대로 일생을 올곧게 살고 사회를 위해 공헌하다가 말년에는 더욱 영적인 깨우침과 가르침에 힘쓰고 자신의 처지와 형편에서 최선을 다하여 공도 사업의 높은 실천에 앞장서는 사람들은 비록 타 종교인이든 원불교의 초입 교도이든, 평범한 일반인이든, 성직자이든 무시선법을 실질적으로 수행하는 분들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삼학병진의 대승선(大乘禪)

대승의 선이라 함은 곧 특별한 선법이 아니며 누구나 닦을 수 있는 선법입니다. 특히 출가한 수행자들만이 닦을 수 있는 선법이 아니며 남녀노소, 유무식을 비롯하여 재가 출가에 전혀 구별없이 닦을 수 있는 선법입니다. 소태산 대종사께서 무시선법에서 극히 강조하신 측면이 이 부분입니다.

무시선법은 곧 일원상 진리의 수행입니다. 다시 말해 정신수양, 사리연구, 작업취사의 삼대력 수행이며 이를 원융하게 회전시켜 병진하는 공부법입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참선이나 좌선은 무시선법의 한 수행법에 속하며 원불교 훈련법의 11개 과목만이 아니라 광의적으로는 원불교의 신앙 수행 모두가 무시선법입니다. 하지만 공부의 주체를 세울 때에는 선(禪)이기 때문에 표준은 언제나 삼학에 두어서 일심, 알음알이, 실행을 놓지 않아야 하고 이 세 가지가 회통, 회전, 병진해야 하며 반드시 육근 동작에서 생산적인 실적이 나타나야만 무시선법을 바로 닦는 것이며 무시선법의 수행을 닦는 완결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회통(會通)이라 하는 것은 일심과 알음알이, 실행이 서로 교차하면서 연마되고 길러져서 심공(心功)이 된다는 뜻이며, 회전(回轉)은 일심과 알음알이, 실행이 각각 주체가 되면서 상호 상보적인 보완관계가 되어 심공이 된다는 것이며, 병진(竝進)은 일심과 알음알이, 실행 중 그 어느 공부도 간과되거나 부족·미흡하지 않는 상태에서 심공이 된다는 뜻입니다. 초기 교단의 비롯을 볼 때 근검절약으로 상조조합을 만들고 영육쌍전, 주경야독, 이사병행의 기치아래 방언 답을 일구었으며, 그 간난한 시절 불법 연구회 초창에 낮에는 양잠, 신발공장, 만석평 농사를 지으며 자립 기반을 얻고 새벽과 저녁에 선과 염불로써 공부를 하면서도 혹 제자 중에 낮 일 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좌선을 한다든가, 불교의 선방에 입선하는 사람이 있으면 엉뚱한 짓을 한다 하여 혼쭐이 난 일들을 상기해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교당을 세울 때 그 당시 자립할 수 있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유리한 유지답을 갖추게 하고 재가 출가가 힘을 합쳐 교당을 유지 자립 할 수 있게 한 점을 오늘에 되살릴 때 이는 교당마다 생산적인 기관이나 일터를 마련하여 재가 출가가 공동으로 자립 교당을 만들어 운영하는 형태가 됩니다.

무시선의 강령, 생활 속의 실천 교리

'일 없으면 헛생각 하지 말고 오직 일심 양성에 주력하고, 일 있을 때에는 불의를 범하지 말고 오직 정의를 양성하라' 하셨는데, 이는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대중을 잡고 공부의 표준을 삼아 살아가게 하신 무시선법의 강령입니다. 잡념 제거와 일심 양성은 우리 공부인들의 떠날 수 없는 마음공부 화두입니다. 헛생각 하지 말고 일원상 진리와 하나 되는 밝고 두렷한 성품의 구경 자리에 도달하는 수행을 쉼 없이 해야 합니다. 마음의 자유, 성품의 오득(悟得), 생사의 자유, 윤회 해탈, 정토 극락이 여기에서 얻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일처리 할 때, 일 있을 때, 일할 때에는 반드시 불의와 정의의 구분이 있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결과론적이고 도덕적인 조목 같지만 생활 속에서 '불의를 놓고 정의를 실천하라'라는 가치관을 결코 놓지 않고 모든 일에 그 대중을 삼으면 곧 세상의 공덕을 쌓는 정의로운 불사(佛事)만을 세상에 실천하고 나투게 된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정의를 실천하라 보다는 양성하라 하셨던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자신의 높은 도덕적인 가치관과 일원상 진리의 대도(大道)를 표준한 정의이기에 타인을 자로 재고 저울질 한 계교심 내지는 객분의 만용으로 내세우는 정의가 아니기에 양성이라고 하였습니다.

도(道)는 만고에 여여하고 시간은 화살처럼 지납니다. 우리 모두를 활불(活佛)로 이끌어 주신 이 무시선법은 천하의 대도이요, 생활 속에서 산부처를 만드는 묘법입니다. 다만 한 걸음, 한 걸음 세상에 제중의 공덕을 나투는 알찬 결과로 완결합시다.

생활 속 삼대력 수행
활불, 산부처 만드는 묘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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