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성균 교무 / 원불교100년기념성업회
봄의 생명이 기지개를 켜던 오전 나절 들려오던 엔진 톱 소리에 귀가 솔깃하여 궁금증을 자아냈다. 점심을 든든히 먹고 봄빛 맞으러 성탑을 향했다. 몇 걸음 걷자니 오전 나절 들려오던 기계음의 정체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반백의 세월을 머금은 소나무의 잔해가 토막 나 뒹굴고 있었다.

총부 영모동산 조성사업으로 인해 반백의 세월은 낡은 역사가 되어 사라지고 새로 옮겨온 나무들로 주인이 바뀐 셈이다. 익산총부를 건설하고 그 속에 깃들여 살던 인간도 윤회를 거듭하듯 유형무형의 자취도 변한다는 사실에 변불변의 이치를 실감케 한다. 교단 100년의 세월에 총부도 장엄불사의 미명아래 멀쩡하던 보도블록이 파헤쳐져 속살을 뒤집고 생채기를 내어 반듯한 공덕탑을 허물고 짓기를 거듭하였다.

총부의 주인은 우리들만이 아니고 구내에 깃들여 사는 온갖 생명붙이들이다. 엄동설한을 견디고 양지 녘에 볕을 쬐고 있는 토끼도 터주이고, 철따라 이따금씩 날아온 철새들의 보금자리도, 사계를 수놓은 온갖 꽃과 나무들도 이 땅의 주인임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그 역사의 뒤꼍에 묻혀 물안개처럼 사라지는 슬픔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말이다.

토막 난 솔의 잔해를 보며 땔감으로 알맞게 잘린 밑동을 보았다. 사람의 나이처럼 솔도 나이테로 세월을 가늠할 수 있다. 족히 반백을 넘어선 나의 동무나무로 그 세월 앞에 머리 숙여 조의를 표하며 잠시 그루터기를 살펴보니 그 곁에 웅크리고 있는 새 한 마리가 눈에 들어온다. 소나무에 둥지를 틀고 살던 멧비둘기 새끼가 둥지를 잃고 숨죽인 채 꼼짝하지 않는다. 살며시 손을 내밀어 한 손으로 안았다. 새의 부드럽고 따스한 온기가 손끝을 타고 온몸으로 퍼진다. 이대로 놓아두었다간 어미가 데려가기엔 덩치가 너무 커서 할 수 없이 거둘 수밖에 없었다.

나의 생명에 대한 어쭙잖은 행동에 비둘기 어미가 둥지가 있던 소나무 주변을 날고 있다. 그 새끼 잃은 어미의 애잔함이 구구구 거리듯 머릿속을 날고 있다. 꼭 살려보리라는 마음을 뒤로한 채 돌아선 발걸음이 가볍지 만은 않다.

오전 나절 톱 소리에 시달리고 둥지에서 떨어져 놀란 모양이다. 땅을 헤집고 지렁이를 잡아 먹잇감으로 주어도 입도 달싹하지 않는다. 어릴 때 새를 잡아 길러 본적이 있어 알지만 새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죽는다. 그래 이왕 죽을 바에 내 품안에서 죽어라. 죽고 살리는 능력은 없지만 그동안 익힌 풍월로 천도를 해주리라.

종이 상자에 무릎덮개를 깔고 보금자리를 만들어 덮어 주었다. 먹잇감으로 지렁이 한 마리와 물에 불린 튀밥도 함께 놓았다. 끼니꺼리가 없는 곳이라 내 따로 줄 것이 없다. 죽든 살든 편안하게만 있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룻밤을 지켜보기로 하였다.

설렌 마음으로 하룻밤을 지나고 종이 상자를 열어보니 움직임이 감지된다. 먹잇감으로 놓고 간 과자 부스러기와 똥이 엉켜져 있고, 먹은 흔적은 없다. 밤새 눈을 감지 않고 살아있음에 감사했다. 집에서 가져온 쌀과, 수수와 밥알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그저 욕심에 초연한 수도승처럼 먹을거리에는 관심도 없다. 자세히 살펴보니 다리가 다친 모양이다. 날갯짓은 금방 날아갈듯 용을 쓰며 퍼덕인다. 마당에 내놓아도 움직임이 없다.

짐승들은 자기 몸에 이상이 생기면 먹지 않고 단식을 하여 치유한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걱정할 일이 아니지만 비둘기가 나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봄은 뭇 생명이 움트는 계절이다. 이름 모를 잡초 하나에도 생명의 경외심을 느끼는데 갓 부화한 멧비둘기 새끼가 저 푸른 하늘을 나를 수 없음에 왠지 가슴이 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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