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신심, 계약기도 주의보

▲ 장오성 교무 / 경기인천교구 송도교당

어느 날 길이가 4㎞ 정도 되는 터널 속에 차가 막 들어섰는데 안이 잿빛 연기로 꽉 뒤덮여 있고 갓길 탱크로리에서는 엄청난 연기가 계속 품어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연기로 인해 앞차의 점멸등도 보이지 않아 차들은 눈먼 거북이처럼 더디게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아 심장이 멎을 지경에서 절박한 기도가 절로 나왔습니다. '사은님! 제발 살려만 주신다면 정말로 착하게 살겠습니다!' 긴 터널을 무사히 빠져나온 후 청심환을 사서 먹고는 무용담을 늘어놓기만 바쁠 뿐 그토록 다짐했던 삶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기도를 저는 우산신심이라고 이름붙입니다. 비오는 날이면 간절히 필요하고 찾는 것이 우산입니다. 그러다가 비가 그치고 나면 놓고 가거나 잊어버리거나 들고 다니기가 거추장스럽게만 느껴집니다.

우리의 신앙이, 심고나 기도가 궂은 날 간절히 찾다가 좀 살만하면 까맣게 잊고 사는 우산같은 비중과 의미는 아닌지 반성할 때가 많습니다.

우주 공간 안에 먼지보다 미미한 존재인 내가 자기 힘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어서 그렇습니다. 무한히 공급해주는 공기를 당장 끊어버리면 몇 분 동안이나 버틸 수 있을까? 이웃 동포, 동식물 아무것도 없이 나 혼자 외로이, 모든 것을 해결하며 사는 것이 가능이나 할까? 움직이지도 못하는 핏덩이를 누군가 키우고 먹이고 가르치지 않았다면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있을까? 나를 보호해 줄 아무런 장치가 없다면 한순간이라도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타력이 가호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모든 은혜의 상징이자 총체가 일원입니다. 마음에 늘 일원을 품고 언제 어디서나 함께하면서 발원하는 것이 신앙이고 심고이고 기도입니다. 나무가 땅에 뿌리내리고 살듯이 온통 법신불 사은의 땅에 마음의 뿌리를 내리고 사는 생활 입니다.

우리의 심고와 기도가, 신앙이 힘이 없는 것은 필요할 때만, 아쉬울 때만 찾기 때문입니다. 기복신앙, 구복신앙만 하니까 그렇습니다. 심고와 기도에는 감사, 참회, 문제해결, 발원이 늘 같이 이뤄져야 가호가 따릅니다. 감사한 것은 그냥 넘어가고 아쉬울 때만 도와달라고 하면 뭐가 예뻐서 들어주고 싶겠습니까. 잘나갈 때도 잊지 않고 찾아주는 사람한테 마음이 가듯이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감사하고 참회하고 성찰하며, 부처 이뤄 중생제도하려는 서원이 함께해야 원하는 것도 이루고 기운도 응하고 변화가 따릅니다.

바른 심고와 기도는 진리의

위력 얻는 가장 빠른길


간절함과 동시에 바른 노력이 함께해야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할 때 간절함의 정도에 따라 이뤄지는 정도도 다릅니다. 얼마 전 작고하신 신바람 박사 황수관 선생은 어릴 때 홍역에 걸려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마당에 지게를 세워두고 묻을 준비를 하는데 어머니는 울부짖으며 그 고름을 혀로 핥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니까 몸에 생기가 돌면서 손가락이 움직이더랍니다. 기도의 간절함에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간절함과 동시에 바른 노력이 함께해야 합니다. 좋은 대학 가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 공부는 안하고 하루에 삼 천배 씩 절만 하고 있다면 원이 이뤄지기 어렵습니다. 부모가 병들어 설산에 핀 꽃을 달여 먹여야 낫는다 한다면, 불가능하다고 포기하거나 기도만 하고 있으면 병이 낫지 않겠지요. 바른 노력이 있어야 감응이 일어납니다. 산에 들어가 눈 속을 헤매면 꽃을 찾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이 감동이 생겨 꽃 있는 곳을 알려줄 수도 있고, 이야기를 전해들은 특지가가 수술비를 대줄 수도 있습니다. 간절함으로 바르게 노력하면 여러 가지로 감응과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원하는 당사자가 해야 효력이 큽니다. 대리인을 통해서 하는 말보다 당사자가 원하는 것을 말해야 전달이 정확히 됩니다. 우리는 자녀들의 것도, 남편의 것도 언제나 한사람이 대표해서 기도하지요. 당사자가 직접 해야 효과가 있고 절박함이 전달됩니다. 기도는 기도하는 그 사람에게 변화가 오고 힘이 생깁니다. 기도도 일종의 수행입니다.

또한 남을 이렇게 저렇게 고쳐달라고 하는 기도는 힘이 없습니다. 간절할 수가 없습니다. 기도하면서 이미 맘에 안 좋은 모습을 그려내고 있으니 기운이 응할 수가 없습니다. 상대방을 변화시키려는 기도가 아니라 그런 모습마저 흔연스럽게 봐줄 수 있는 마음의 힘을 달라고 해야 비로소 간절함이 생깁니다.

심고와 기도를 하면 다 이뤄질까요? 다 이뤄집니다. 다만, 꼭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만큼 이뤄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당장 이뤄지는 기도도 있고, 며칠 걸리는 것, 몇 달 걸리는 것, 몇 년 걸리는 것, 평생 걸리는 것, 몇 생 걸리는 것도 있습니다. 사안에 따라, 정성에 따라, 업식에 따라 달라집니다. 겨우 백일기도 해놓고, 그것도 기도시간에 잠깐씩 해놓고는 왜 안 이뤄 주느냐 원망하고 실망하고 포기하는 것은 계약기도이고 객기이고 욕심입니다. 백일만 하면 다 이뤄주겠다고 누가 약속했습니까? 자기 혼자 진리와 계약하고 이만큼 할 테니 들어달라고 하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닙니다. 그러기로 하면 이 세상에 자기 뜻대로 못살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 자기가 지어놓은 대로 순리대로 되는 것이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도가 차야 돌아옵니다.

진인사대천명입니다. 정성을 다할지언정 결과는 진리에 턱 맡겨버려야 합니다. 사람이 할 일은 사람이 하고 진리가 할 일은 진리가 알아서 정확히 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살생을 삼가고 상생과 불공으로 살아야 합니다. 마음속으로 나는 기도인 이니까 늘 먼저 풀어주고, 늘 먼저 이해해주고, 늘 살려 내주고, 늘 먼저 베풀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실지불공을 함께 해야 합니다. 그러면 가장 먼저 자신이 변하는 위력이 생기고, 모든 문제가 잘 풀리면서 늘 진리를 떠나지 아니하여 감응과 위력을 체험하며 살 수 있습니다.

바른 심고와 기도는 진리의 위력을 얻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나는 바른 기도인 입니까?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