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트 워쇼 교도 / 노스캐롤라이나교당
지난해 10월12일 나는 (거의) 매일 글쓰기 명상(경전 사경을 한 뒤, 내 감상을 적는 것)을 시작했다. 3월7일(89개의 항목 이후) 나는 정전 사경을 끝마쳤다. 지난해에 일원상서원문과 반야심경을 각각 50번씩 사경한 뒤, 이번 〈정전〉 사경을 시작하게 됐다.

이 명상 실습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은 아니지만, 나에게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적어도 매일 한 번씩, 나는 멈춰서, 깊은 숨을 쉬고, 경전과 내 노트를 펴고, 펜을 잡은 뒤, 잠시 동안 다른 상태의 의식으로 들어갔다. 나는 이 명상적 글쓰기가 마음을 멈추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매일 다른 구절을 쓰는 것은 원불교 교리를 보다 깊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줬다. 그리고 점차, 나는 각각의 교리가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해하게 됐다. 내 감상을 쓰는 것은 경전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을 도와줬다. 가끔 예리한 통찰의 순간도 있었고, 때로는 구절이 내 신념과 맞지 않을 때는 고개를 갸우뚱할 때도 있었다.

다음은 몇 가지 예시들이다. 사경 첫째날, 나는 일원상을 뜻하는 동그라미를 그리고 글을 썼다. "매일 경전을 사경하면서, 내가 나의 몸과 감정에 대한 집중을 확장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경전의 의미를 보다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는 끝이 없으며, 어떤 일이 생길지 예측할 수 없는 여행이다."

12일째 일원상 법어, 이 구절에 대한 나의 이해는 '순간 번뜩임'이다. 어제 저녁에, 줄리는 뜨개질을 할 수 있도록, 엉킨 실 한 뭉치를 풀면서 보냈다. 이것이 바로 이 구절에 대한 나의 느낌이다. 32일째 동포 보은의 강령, 나는 '그 도를 체 받아서 자리이타로써 할 것'에 충격을 받았다. 내가 자라왔고, 어린 나이에 거부했던 '전도(개종)'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우리는 '말한 것을 실천하기'에 대해 말한다. 체 받는 것은 본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34일째 동포 보은의 결과, (이 구절에선 고개를 갸우뚱하게 됐다) 어떻게 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조화롭게 지낼 수 있는가? 나는 다른 사람의 믿음을 희생하면서 자신의 믿음의 정당성을 강제로 요구하는 사람들에 대해 자비심을 낼 수 없다.

39일째 오늘 나는 제2장 사은을 마쳤다. 나는 일요일마다 일원상 앞에서 사은에게 절을 한다. 처음에 사은은 직접적이고 꽤 분명해 보였다. 지금은 복잡해 보인다. 그리고 나는 '은혜(Grace)' 라는 단어가 갖는 많은 뜻을 사랑한다. 52일째 정신 수양의 결과, 수양은 정말 사랑스러운 말이다. 식물은 위 아래로 자란다. 그들은 돌봐져야만 한다. 결국 그들은 죽게 되고, 그것들은 땅으로 돌아가서 다음해의 영양분으로 쓰이게 된다.
54일째 나는 11일 동안 글쓰기를 멈췄다. 펜을 다시 잡으니 기분이 좋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내 호흡을 느끼고, 내 이마를 이완시킨다. 61일째 오늘의 구절을 쓰는 동안 정말 눈을 떠 있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경전의 구절을 2번 읽어야만 했다. 부처님도 책상에서 졸았었을까? 65일째 염불의 요지, 나는 우리가 보다 신성하기 위해선 어떤 것을 좀 더 더해야 한다는 것보다, 우리의 본래 자성을 회복한다는 개념을 좋아한다. 73일째 의두 요목, 나는 항상 질문을 많이 해왔고, 종종 다른 사람들을 귀찮게 했었다. 이 구절의 몇몇 질문들은 마음을 울렸고, 한두 개 질문은 내게 의미가 없었다. 나는 질문을 질문하는 것 같다.

80일째 불공하는 법, 이 구절은 내게 '처처불상, 사사불공'을 설명해준다. 우리는 부처님을 만나거나 불공을 하기 위해 산꼭대기에 올라갈 필요가 없다. 89일 이후 법위등급, 오늘 나는 <정전> 사경을 끝마쳤다. 나는 이제 보통급이다. 내일 나는 계속해서 <대종경> 쓰기를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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