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으로 사람을 만나다

▲ 김정환 교수.
연세대학교 원불교 교우회가 창립 30주년을 맞아 법, 경제, 녹색을 주제로 기념강연회를 열었다. 2일 연세대학교 백양관S111에서 진행된 첫 강연에는 김정환 연세대학교 연구교수가 나섰다. 그는 '법으로 사람을 만나다'는 주제 강연으로 "결국 법치를 실현시키는 것은 사람이고 법은 사람 사는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다"며 "법이라는 것은 나를 위해 존재하고 소수자 보호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고 강조했다.

법은 자유·권리 보장

사람이 살면서 예측가능성이 매우 중요하다.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물어보면 여러 가지를 이야기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물어보면 먹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먹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자유다. 우리 공동체의 질서를 깨뜨리고 용납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죄인에게 가장 큰 형벌로는 자유를 빼았는 것이라고 한다.

내 삶을 내 계획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을 자유라고 한다. 그 자유라는 개념 속에는 계획이라는 것이 들어간다. 내가 삶을 어떻게 살아야겠다. 그러면 내가 무엇을 계획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나의 삶의 환경에서 예측가능성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과거에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에서 우리는 자유를 누릴 수 없었다. 왜냐하면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법이 가지고 있는 첫 번째 가장 중요한 가치는 예측가능성을 확보함으로써 우리에게 그 범위 내에서 자유를 확보해 주는데 있다. 우리가 법은 내가 누리는 자유를 억압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법은 항상 '하지 말라'는 식으로 이해한다. '하지 말라'는 것은 '여기까지 하라'는 의미가 있다.

예를 들면 국가에서 마약의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마약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 말기 암환자들의 고통을 완화 한다든지 또 정신과 특정진료에는 마약이 들어간다고 한다. 그 사람들한테만 마약을 사용할 자유를 준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합의 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음식점을 하고 싶어하는 데 음식점을 한다고 해서 그냥 음식을 가져와서 팔 수 있는가? 우리는 그 위생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국민이 안전해야 하니까 국가는 최소한의 위생상태만 지켜진다면 되도록 많이 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음식을 파는 것과 마약을 파는 것은 자유의 범위가 다르다.

법이란 결국에 국민들이 누릴 수 있는 자유의 성질을 파악해서 어디까지 자유를 누리게 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것에 대한 문제가 첫 번째이다.

내가 좋아하는 말 중에 '사람은 추억을 남기며 살아야지 판례를 남기며 살면 안된다'는 말이 있다. 인생의 판례를 남기면 안되겠지만 어쩌다 보니 나쁜 일에 연루가 되는 경우가 있다. 경찰서에 조사 받으러 갔다. 나를 잠을 재우지 않고 조사를 한다, 밥 안 주고 조사한다, 잠 재우지 않고 조사를 하고 있다. 이럴 때 "나 밥 좀 먹고 조사 받읍시다. 나 잠 좀 자고 조사 받읍시다"라고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현대국가에서는 권리화 돼있다. 100년 전에는 아마 권리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헌법 37조에 보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가치가 자유와 권리 두 가지 단어로 구성 됐다. 권리란 무엇인가? 권리는 쉽게 말하면 내가 그것을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힘을 말한다. 권리가 없는 행동을 하면 사람이 이상하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권리가 발생할 수 있는 필요한 요건은 보통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계약이다. 매매를 하면 된다. 또 법률이 있으면 된다. 법률로 정한 법위에서 권리를 행사 할 수 있다. 보통은 법률로 권리가 발생한다. 세 번째는 계약과 법률이 없어도 상식적으로 부합하면 된다. 우리는 이렇게 자유와 권리의 세계에서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법은 사람 사는 이야기

보통 우리가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말을 쓴다. 법 없이 사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인가? 꼭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다. 사람이 사람답기 위해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두 가지 가치가 자유와 권리인데 법은 그 두 가지를 보장해주는 제도적 약속이다. 그런데 우리는 일반적으로 법대를 나오고 변호사를 하거나 법 공부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법은 남에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이 영업을 하고 싶어서 시청에 간다. 그러면 공무원들은 100%센트 '안된다'고 하면서 '해당법령이 이렇게 이렇게 돼 있기 때문에 당신은 안된다'고 말할 것이다. 이처럼 법은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데 못하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

법의 세계라는 것이 별거 아니다. 다만 나와 멀리 있는 것 뿐이다. 멀리 있는 누군가에게는 자기 이야기가 된다. 사람이 안 들어가는 법 이야기는 없다. 세상에 아무리 어려워 보이는 법이라도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다. 예를 들면 어려워 보이는 지적재산권도 물건을 하나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보통 사람들이 발명 같은 것을 하지 않아서 어려워 보이는데 모두 사람 사는 이야기다.

대한민국 헌법에 가장 중요한 부분을 하나를 뽑으라면 헌법 제10조이다. 헌법 제10조에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가진다'고 명시해 있다.

국민에게는 지켜야 할 4대 의무가 있다. 그것이 바로 국방·납세·교육·근로 의무이다. 국가도 지켜야 할 하나의 의무가 있다. 헌법에 '국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가진다'고 했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존재의 목적이다. 헌법에서 이렇게 약속했다. 이것이 굉장히 소중한 헌법 조항이다.

한 사람이 한사람이 소중하고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또 불가침의 인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같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같이 살고 있기 때문에 타인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 나의 행위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음주운전이 취미라고 생각해 보자. 그 사람은 괜찮다. 그 사람의 행복 추구권이 헌법 10조에서 보장이 되는가? 보장이 된다.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에 조건이 붙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리의 대명제가 등장한다. 나의 권리로 타인의 권리를 침해할 수 없다는 대명제가 등장한다. 헌법 제37조에서 '①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이유로 경시되지 아니한다. ②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고 밝혔다. 여기서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법률로써 제한 할 수 있다고 천명했다. 이것이 법이 필요한 이유다.

법은 소수자 보호를 위한 것

현대사회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법은 많아진다. 우리는 '법이 없는 세계가 좋다'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고 '법이 나를 규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합리적이라는 인간은 약자를 보호하는 법을 자꾸 만든다. 왜냐하면 법이 아니면 약자가 보호를 못 받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헌법 10조와 37조에서 보았듯이 왜 권리들을 일일이 써놓아야 하는 가면 우리는 어느 순간 또는 지금 현재 약자일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다. 내가 늘 강자인 사람에게는 법이 필요없다. 강자에게는 법이 없는 세상이 좋은 것이다.

그러나 내가 어디선가에서 소수자, 약자이면 나에게 법이 필요한 것이다. 다수의 폭력을 예를들면 의사결정과정에 다수결의로 할 때가 많다. 녹색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고 소수의 빨간색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내자고 하면 되겠는가! 내가 이 자리에서 빨간색을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냈다면 무언가가 불합리하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이런 불합리한 것을 지켜주기 위해서 법이 필요한 것이다. 법의 근본정신은 소수자의 보호와 맞닿아 있다. 소수자를 보호할 필요가 없다면 법이 필요없다.

이런 법이 잘못 사용된 경우도 있다. 일제시대 때는 일제가 다수였고 우리 국민은 소수였을 것이다. 일제는 조선인 강제징집을 법으로 만들었다. 2013년에는 우리 여기에 앉아 공부하고 있지만 1943년에는 여기에 있는 남학생은 전부 전쟁터에 나가야 하고 여학생들은 종군위안부로 가야 했을 것이다.법이 이렇게 잘 못 쓰인 적도 있다. 법의 정신을 망각한 것이다.

'법을 만들면 그것이 강제력을 가진다'라는 법의 강제력에 초점을 맞춰서 법을 바라보게 되면 그런 법을 독재에 활용할 수 있다. 그런 독재자들이 나는 법치주의를 한다고 말한다. 그 법치는 법치가 아니다. 그리고는 국민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법을 지켜라 준법정신을 가져라고 말한다. 준법과 법치는 다르다. 준법은 법을 따른다는 의미이지만 법치는 원래의 의미는 소수자 보호의 의미가 들어있다.

우리 사회에는 누구나 소수자가 될 수 있고 누구나 소수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법으로 통치한다. 강자를 견제하고 약자를 보호하는 것이 진정한 법이다.

인류는 발전의 한 축은 기술의 진보이다. 또 하나의 축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법치를 발전시킨 것이다. 적어도 소수자의 권리를 확장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는 것이다.

오늘 이 시간을 이용해 나는 법이 나를 위해 존재하고 소수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우리 사회에 법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를 가늠할 때 강자가 제대로 견제가 되고 약자가 제대로 보호가 되는지, 이것이 바로 법치의 정신과 맞닿아있는지를 다시 한 번 떠올려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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