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겁의 약속

불보살들은 시방일가 사생일신의 대서원 아래 한 마음으로 삼세를 일관하고 구제의 인연 따라 동서남북에서 출현한다. 숙겁에 약속했던 불연을 기다리다 일원회상을 찾아 위법망구(爲法忘軀) 위법망사(爲法忘私)의 정신으로 교단의 대의를 세워 후진들의 사표가 된 달타원 이정화(達陀圓 李正和, 1918~1984) 대봉도.

경상도 금릉군이 고향인 훈산 이춘풍 선진은 도를 구하기 위해 영광으로 간 고모댁인 정산종사 집안을 환고향시키겠다는 뜻으로 영광을 찾았다. 그러나 정산종사의 부친 구산 송벽조 선진의 안내로 대종사를 뵙고 그 위덕에 감복하여 제자가 됐다.

그는 원기6년 가족을 데리고 변산성지로 들어가는 초입인 보안면 종곡리로 이사를 했다. 이때 8명의 딸 중 항타원 이경순 종사(7세)와 달타원 대봉도(4세)도 함께 왔다. 이후 대종사께서 영산에서 변산을 오갈 때 하룻밤을 유숙하는 숙소요, 쉼터 역할을 했다.

이사 온 이듬해에 두 자매는 대종사를 처음 뵙고 인사를 올렸다. 원기10년 이춘풍가는 봉래정사의 수호 임무를 맡고 석두암 밑으로 이사를 했다. 이때 대종사께서는 두 자매에게 '경순'과 '정화'라는 법명을 내려 주셨다. 이런 환경 속에서 자란 두 자매는 자연스럽게 부모님은 부모이자 스승이 되었고, 언니는 자매이자 친구로 한 몸 같은 인연이었다.

두 자매는 대종사께서 변산성지에서 생애 최대의 내핍생활을 하며 교단 만대에 제생의세 하실 경륜과 포부를 수립할 때 교단의 미래요, 희망으로 기쁨을 주었다. 어찌 보면 어린이 교화의 시원으로 대종사께 재롱을 부리며 위안과 기쁨을 드리는 효성을 했다.

원기17년 출가를 위해 총부를 찾았다. 그러나 총부의 사정이 어려워 전주 제사공장에서 학비 마련을 위해 일을 해야만 했다.

18세 되던 원기21년, 부친의 추천으로 숙겁의 약조인 전무출신을 서원했다. 원기22년 영산공양원을 시작으로 교직을 수행하여 서울교당 서기와 대마교당 순교를 거쳐 신흥·운봉·수계·마령·종로·서성로·봉덕·교동 등 일선교당에서 36년간 일원대도 선양에 전력했다. 특히 대구에서 항타원 종사와 함께 16년간을 봉직하며 교화의 불모지였던 경북지역을 개척하며 일원대도를 전하는 터전을 튼튼히 했다.

원기 55년부터는 영산선원 교감, 영모원장, 감찰원장직을 수행했다.

'공명정대'란 좌우명대로 감찰원장 재임시엔 법규준수를 통해 법치교단의 풍토 조성에 심혈을 기울이며 대의를 세웠다. 또한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어찌 다행 일원대도회상 만나 이 공부 이 사업을 하게 되었으며, 한 스승을 만나기도 어려운데 큰 스승님을 세분이나 모셨으니 이 보다 더 큰 행복이 없다"며 일원대도회상 만난 기쁨과 스승님에 대한 보은으로 일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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