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졸업하고 최종 수습과정(지금의 원불교대학원 역할)을 마칠 무렵, 스승님 몇 분께 수행의 초월적 체험이 담긴 글 20편 정도를 올렸다. 받아본 법타원님은 "수고했다. 그런데 그 중 무엇이 제일 중요하지?" "무심적적입니다." "됐다. 그럼 일상에서 무심이 잘 되나?" "아니요 잘 안됩니다." "이제부터 그 공부를 주로 해보라"고 했다.

그 후 타심, 천지도수, 영들의 소종래 등에 대한 관심을 놓으니, 까치발로 서 있다가 내려놓는 것처럼 편안하고 더욱 안정된 기운의 느낌을 받았다. 초월적 수행이 진리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이해를 돕는 것은 사실이지만, 수행자가 필요 이상으로 집착하면 자신의 기운을 요사스럽게 할 수 있다.

교무로서 시작과 더불어 비움은 새로운 화두가 됐다. 끊이지 않는 과제와 일 속에서의 비움의 화두는 마음 속 응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교역이라는 삶의 방향에서 당면한 일과 과제가 마음의 틈을 주지 않았다.

비움이 수행자의 감각으로 자리를 해야 하는데 미흡하기만 했다. 젊어서야 좌선을 하면 간헐적으로 깊은 경지에 머무르지만, 중년이 된 수행자가 10번을 앉으면 예닐곱은 정에 드는가. 일 없이 존재할 때 관념의 밑살이 쑥 빠져 흔적이 없는가. 무시선으로 늘 깨어있는가. 수행자로서의 첫 매듭은 이 모든 것에 감각으로 자리할 때라고 여겼다.

내 스스로 할 일의 수위를 조절하며, 수행길을 다듬고 매듭을 지을 수 있는 길을 바람과 동시에, 운영의 부담을 안고 있는 삼동연수원에 이르렀다. 이 곳에서 좌선에서의 비움, 의식이 깨어있는 데에서의 비움, 행선과 무시선의 정리 등으로 감각적인 코드를 얻게 되고, 수행길을 다듬어 갈 수 있는 기회가 됐다.

어려서부터 축구하는 것과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는데, 운동이나 그림을 꾸준히 하다보면 마음가짐이 감각으로 이어져서 저절로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운동이건 그림이건 한 동안 놓고 보면, 마음이 감각으로 이어지지 않는 막연함에 답답해 할 때가 있다. 수행도 마찬가지라, 마음 비움에도 감각이 있어서 마음을 비우고자 할 때면 그냥 비울 수 있지만 감각으로 이어지기까지의 수행을 못했거나, 수행이 쉬면 막연한 답답함만 존재한다.

수행자에게 있어서 비움의 감각이 생겨 코드를 알기까지 매듭짓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수행하겠다고 연수원을 찾는 사람들에게 비움의 감각을 지닐 수 있게 연습을 시킨다. 우선, 의식이 깨어있는 상태에서 관념을 놓고 마음 비우는 연습을 시키는 것으로 빈 마음으로 사물을 보게 한다.

마음을 비워 사물을 보면 비움의 말과 비움의 느낌을 나타내는 공통점이 있기에 객관화된 체크를 해줄 수 있다. 표면적 비움에 감각이 생기면 내면의 깊은 비움에 감각을 지니는 데에도 수월하다.

<삼동연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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