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문대할망, 어디 이쑤꽈~ 보고정 허우다~"

때론 내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과 느끼게 해주고 싶은 것들이, 매번 내 마음과 같이 그렇게 전달되진 않을 것 같다. 제주가 그랬다.

숲에서 바다에 이르는 길

시흥에서 종달리와 해안도로를 따라 성산일출봉이 보이는 광치기 해안까지 이어지는 올레 1코스는 '처음(시흥)과 끝(종달)'을 동시에 만나는 올레코스이다. '빠른 속도'에 지친 사람들이 제주 올레 길에서 치유 받고 위로를 얻고 있다. 두 발로 느리게 걸으며 자연과 사람을 더욱 그리워하게 됐다.

이 길에서 삶을 지탱할 지혜와 방법을 터득하고 있음이다.

제주는 삼다(三多)의 섬답게 여성 신화로 우뚝하다. 제주를 만든 것은 어마어마한 키와 몸집의 할머니, 설문대할망이라고 전해진다. 성산일출봉에 오르면 설화에 나온 것처럼 돔(Dome)이 움푹 파여 있다. 이 봉우리는 사실 한라산의 기생화산, 바다 속에서 폭발한 작은 화산이 솟아올라 분화구만 남은 것이라 보면 된다. 빙 둘러싼 성(城)처럼 보이는 산이라 하여 성산, 해가 떠오르는 오름이라 하여 일출봉이다.

일출봉의 아름다움은 정상에 올라 성산포를 굽어보는 풍경에만 있지는 않다. 종달리에서 섭지코지에 이르기까지, 섬의 동남쪽에서는 성산을 외면할 도리가 없다. 선명한 초록빛의 드넓은 비탈과 그 비탈위에 제주 말들의 느릿한 움직임이 고고하면서도 초연한 아름다움이다.

멀리서 바라볼 때에도 경사면을 오를 때에도, 분화구에 다다라 바깥을 둘러보는 정상에서도 모두 하나같이 수려한 자태를 자랑하는 성산일출봉.

거기에 서서 마음속으로 외쳐본다. "설문대할망, 어디 이쑤꽈~ 보고정 허우다~~."
착한카페 '커피잇수다'

일출봉의 초입 '커피잇수다'는 일상에 쉼표를 찍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다. '여행자 쉼터'라는 이름은 그냥 붙여진 것이 아니다.

이곳은 '삶'을 팔고 또 공유한다. 뜻이 맞는 이들이 작은 책읽기 모임을 진행하기도 하고, 네팔 사람들이 직접 만든 수공예품 등을 대신 팔아주며 수익금을 전달하는 중개 역할도 한다. 지역 작가가 직접 만든 제주 장식품 등 제주와의 추억을 나누는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커피 대신 감귤진피차, 야생초떡차, 청보리순차 등을 '음미'해봐야 한다. 정성들여 농사지은 값진 땀으로 공양하는 음식들이다. 감귤진피차의 진하고 기분 좋은 달큰함이 여행자의 피곤함을 달랜다. 오메기떡과 보리쑥떡도 향긋하다.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들의 마음이 전해지는 '착한 카페'이다.
▲ 멀리서 바라볼 때에도, 경사면을 오를 때에도, 분화구에 다다라 바깥을 둘러보는 정상에서도 모두 하나같이 수려한 자태를 자랑하는 성산 일출봉.
섭지코지 글라스 하우스

햇볕도 따갑지 않고, 선선한 바람도 불어주었다. 섭지코지를 산책할 방법을 달리했다.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건축물을 먼저 보기로 한 것이다. 이 길은 입장료를 따로 내지 않아도 된다.

섭지코지는 바람을 만나러 가는 길처럼 느껴졌다. 중간중간 산책로를 둘러서 가기도 하고 흙길을 밟으며 풀숲 길을 걷기도 한다.

푸르른 바다와 신록 사이로 불어오는 기분 좋은 바람, 오랫동안 앉아 햇빛도 받고, 꽃도 만지고, 바다도 보고, 바람도 만났다.

바람을 안고 있는 글라스하우스. 그 건물에 민트 레스토랑이 있어서 민트라고 칭하기도 한다. 바람결에 민트향이 퍼지는 듯, 마음안에 '좋다'라는 느낌.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봄과 여름의 중간사이, 아마도 이 순간이 오래오래 기억될 것 같았다.

한국의 고흐, 이중섭 미술관

이중섭은 한국의 고흐라고도 불릴 만큼 둘은 닮은 면이 많다. 살아 생전 인정을 받지 못하고 철저한 생활고에 시달리며, 결국은 불행하게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나서야 천재화가라고 칭송 받은 작가.

반 고흐에게 해바라기가 상징적인 의미였던 것처럼 이중섭에게는 소가 그런 존재였던 것일까? 하지만 그의 작품 중 가장 많이 그려진 것은 바로 '아이들'이다. 가슴 속에 사무치는 아내와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그의 그림이 됐다.

사실, 이중섭미술관은 기대만큼 이중섭의 그림들로 차 있지는 않다. 300여 점이나 되는 그의 작품들은 뿔뿔이 흩어져 있는 실정이다. 열악한 상황 때문에 주로 기증받은 소장품에 의존해 운영되다 보니 조금은 허술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작품 이상으로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이중섭이 생전에 가족과 주고받았던 편지들이었다. 섬세하고 위트 있는 표현과 손수 그린 재미나는 그림들로 가득 채워진 편지지에는 그의 일본인 아내(남덕)과 두 아들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이 절절히 묻어난다.

'나의 상냥한 사람이여, 한가위 달을 혼자 쳐다보며, 당신들을 가슴 하나 가득 품고 있소.'(아내에게 보내는 이중섭의 편지 중 일부) 그러고 보니 느낌은 다르지만 이 또한 고흐가 동생 테호와 주고받았던 편지들을 떠오르게 한다.

왠지 모르게 쓸쓸하고 긴 여운이 한참을 내 곁에 맴돈다. 미술관을 여기저기 걷다 주크박스를 찾아 조심스레 눌러보았다. '바닷물이 철석철석 파도치는~~' 서귀포 칠십리가 낡은 축음기의 구슬픈 노랫 가락으로 흘러나온다.

이제 다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삶이란 결국 소중한 것 버리고, 길들인 시간을 떠나보내는 일' 아닌가. 무엇을 했건 미련은 두지 말 것. 다시 한발 한발 내 걸음으로 제주 올레 길을 걷는다.
▲ 감귤진피차의 진하고 기분 좋은 달큰함이 여행자의 피곤함을 달랜다. 오메기떡과 보리쑥떡도 향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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