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진난만한 아이가 태어나 조금씩 자라면서 세상을 인식하다가 구분하며 이름을 배운다(분별). 이어서 지식과 경험이 더해지면서 사회적 시각, 개인적 취향과 나름대로의 좋고 싫음이 생겨난다(차별). 좋은 것과 좋아하는 일에 다가가 자주하게 됨으로써 그에 따른 습관이 형성된다. 그 습관에 의해서 자기의 인격을 형성하게 되고, 그 인격이 삶의 질을 이루는 인생이 된다.

의식의 경로에 의해서 마음을 잘 길들이면 부처가 되지만, 왜곡되게 길들이면 중생이 된다. 중생의 마음은 성품이거나 그대로 인식하는 분별의 차원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차별에서부터 이루어간다.

여고생들 사이에서 흔히 있어지는 말들이 있다. "쟤는 아주 꼴 보기 싫어! 밥을 먹는 것도 얄밉고, 발소리도 싫고, 모두가 싫어!" 이처럼 하나가 싫으니 다 싫은 것처럼 내 마음에 입력된 느낌, 생각, 경험으로 자리한 첫 의식에 의해서 모든 것을 왜곡되게 바라본다. 여고생 시절에 극명하게 나타나는 모습이나, 마음을 깊이 성찰하지 않고 길들여온 사회라면 별반 다를 게 없다. 개인의 감정에 더하여 학연, 지연, 혈연에 의해서 잃었던 균형감을 되찾고자 노력하는 사람도 많지만, 사회 전체로 볼 때는 참으로 드물다.

차별이 아닌 분별에서부터 마음을 쓸 수만 있어도 그 사회는 '굉장히 성숙하다' 할 수 있다. 분별은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안목으로서, 객관과 합리가 있고 사회적인 룰을 공유하는 마음이다. 설사, 개인의 취향에 편안하지 않는 사람이 있더라도, 사회적인 안목에서 수용할 정도의 심법이라 할 수 있다. 사회가 다양함의 조화에서 더욱 풍요롭다는 것을 아는 위정자라면 나랏일에 필요한 인재를 등용 할 때, 가장 적합한 인재를 천거함에 사사롭거나 주저하지 않을 정도는 된다.

진나라 황제 도공은 '기해'라는 재상이 나이가 들자, 그에게 후임을 천거하라 하니 '해오'가 적임자라 했다. 황제는 정적인 '해오'를 천거함에 놀라 그 연유를 물으니 재상에 합당한 사람을 천거하라 해서 그랬을 뿐이라고 했다. 그 다음 적임자는 누구냐고 물으니 '오가'라 일컬었다. 세인들로 하여금 당대 최고의 재상감이라 평을 듣고 있던 '오가'는 바로 '기해'의 아들이었다.

정적을 천거하기도 어렵지만, 원숙한 인격을 지닌 사람으로서 원근친소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아들을 천거함은 자신 의식세계에 대한 균형감각을 철저하게 신뢰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이다.

하루의 시작은 자신의 주소가 있는 집에서부터 일어나 살아가는 것처럼, 우리 마음은 어디에 주소를 두고 살아갈까? 관념, 욕심, 집착과 막 길들인 습관에 의한 차별은 아닐지 염려된다. 수행자라면 마음의 주소가 최소한 차별이 아닌, 분별은 되어야 부끄럽지 않을 텐데….

<삼동연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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