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기(無邪氣)의 자비보살

"무사기(無邪氣)의 정기(正氣)로 뭉친 도인, 관세음보살과 같은 자비보살이 우리 회상에 왔다"며 대종사께서 기뻐하신 항타원 이경순(恒陀圓 李敬順, 1915~1978)종사. 대종사의 기쁨 그대로 그는 진리와 법과 회상과 스승과 하나가 되어 법맥과 신맥을 이으며 법풍을 불렸다.

"천하에 제일 큰 것이 무어냐." "사람의 마음입니다." "어찌하여 마음이 제일 크다 하느냐." "마음이 있어야 참선도 하고 불법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은 허공이 제일 크다 생각한다." "마음이 곧 허공이라 생각합니다. 허공은 형상이 없듯이 마음도 그러합니다." 10세 무렵 부친 훈산 이춘풍 선진과 나눈 문답이다.

그의 부친은 도를 이루기 위해 전라도로 건너간 고종사촌인 정산종사 가족을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려고 방언공사중인 영광 땅을 찾았다. 그러나 대종사를 뵙는 순간 공자님을 뵙는 듯 황홀하여 감복하고 제자가 됐다. 원기6년 부안군 보안면 종곡리로 이사했다.

이후 대종사께서 변산을 왕래하며 쉬어가는 곳이 됐다. 대종사께서 총부건설을 위해 변산을 떠나시며 그에게 봉래정사의 수호를 명했다. 원기10년 춘풍가는 석두암 밑으로 이사했다. 이런 산중생활은 자연히 부친은 스승이 되고, 세 살 아래 동생(달타원 이정화대봉도)은 친구가 됐다. 공부를 하는 어른들과의 만남은 자연스럽게 성리문답으로 이어졌다.

원기14년, 15세 소녀는 전무출신을 하기 위해 총부로 왔다. 당시 총부의 형편이 너무 어려워 제사공장을 다니며 학자금을 마련해 원기20년 영산학원에서 수학했다. 원기25년 서울교당 부교무로 첫 교역에 임했다. 이듬 해 개성교당교무로 부임해 북안동에 5백여평에 이르는 한옥을 매입하고, 직조공장등을 운영하며 북한지역 교화 기금을 마련했다.

그러나 원기35년 해방이 되자 남과 북이 갈리면서 훗날을 기약하고 초량교당으로 이동했다. 이때 부산극장에서 막을 올린 연극 '이차돈의 죽음'은 성황과 함께 지역교화에 영향을 주어 많은 교도들이 대도정법에 회향했다.

원기41년에는 대구교당을 설립하고 15년간 봉직하며 서성로·김천·안동·봉덕·성주·삼덕 등 대구·경북 지역 교화의 터전을 다졌다. 원기56년 부산교구장직을 수행하며 부산지역의 교세 발전에 중흥을 이뤘다. 교화현장에서 만난 법연들은 각기 처한 곳에서 알뜰한 창립주가 되어 교화의 중추 역할을 할 만큼 교화 역량이 뛰어났다.

그는 총부로 향하는 마음이 남달랐다. 아무리 어린 학생이라도 총부에서 온 부처님이라며 처처불상 사사불공의 정신으로 대했다. 후진들에게는 늘 전체공심을 심어주며 교단의 대의를 세워줬다. 주소일념으로 교단과 스승과 후진들에 대한 생각뿐 이었다. 최후일각까지도 순정기(純正氣) 순공심(純公心) 순신성(純信誠)으로 사무여한의 불길을 활활 타오르게 한 일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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