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씀씀이의 바탕이 차별인지, 분별인지, 아니면 분별 주착이 없는 마음인지를 따라 중생과 지성인 그리고 부처인줄 가늠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부처의 마음을 지녔다는 것이 곧 모든 능력을 얻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성품(性稟)에서 발현된 마음은 어그러져서 나타나지 않음을 말하는 정도이기 때문이다.

일심(一心)을 흔히 집중하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원불교에서의 일심은 성품을 여의지 않음을 말한다. 물론 일심 속에는 집심(執心), 관심(觀心), 무심(無心), 능심(能心)이 있어서 집심인 집중을 배재하는 것은 아니다. 일심이 동(動)하면 정의가 된다는 것도 성품이 그대로 발현되면 바르게 나타남을 일컫지만, 바르다는 것이 곧 능력까지 대변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물론 사람에게 기본적으로 있는 열정이 성품을 기반으로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자비로 승화되기 마련이지만, 자비에도 수행의 정도에 따라 차이는 있다. 자비로 이어갈 수 있게 하는 열정이 성품으로 발현되는 과정을 소태산께서는 신분의성(信忿疑誠)으로 보았고, 이 신분의성으로 삼대력(수양,연구,취사)을 얻도록 했다. 일원상의 진리에서 마음 발현의 경로를 돈공(頓空), 분별(分別), 차별(差別)로 크게 구분지어서 밝혔지만, 분별을 그저 구분하는 정도가 아닌 하늘의 이치인 대소유무(大小有無)로 바라보도록 했다. 즉 성품에서 발현될 때 순수의식을 넘어서 진리의 의식으로 분별하도록 한 것이다.

수행자가 자칫 성품을 회복하면 깨달음과 능력을 얻는 것처럼 여길 수 있지만, 그 한계는 순수성이고 나아가 맑게 비춰봄이다. 성품회복이 만능키는 아니라고 한계 짓는 이유는 수행이 자칫하다가는 순수성에 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순수성이 진리의 눈으로 이어지지 못하면 느낌에 의하거나 방향을 잡지 못해서 방황하다가 허송세월을 보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수행단체, 또는 홀로 수행해온 사람들과 만나보면, 나름대로 순일한 마음으로 수행하여 초월적인 감각을 지니기도 하지만, 진리에 의하지 못한 초월적 감각은 의미를 잃고 세월 속에 묻히기 일쑤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성품을 회복하라는 이유는 일반 사람들이 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지식을 얻고 기술을 습득하며 살아가지만 대부분 관념의 울을 넘어서지 못한 나머지 욕망으로 치닫기 때문이다.

순수성에 그치지도 않고 지식이 관념에 갇혀 욕망으로 치닫지 않는 그야말로 바람직한 모습이라면, 성품을 회복하여 다시금 발현시킬 때에는 분별에 진리를 품은 의식으로 진리의 행으로 나타냄이다. 성품에 의한 진리의 의식을 지닌 사람에게는 모든 지식과 기술이 쌓이고 발전되는 만큼 은혜롭게 사용되어서 세상을 풍요롭게 한다. 소태산께서는 분별에 진리를 품게 했다.

<삼동연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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