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께서는 진리가 발현되는 첫머리를 공적영지(空寂靈知)의 광명을 따라 나타난다고 밝혔다.

'공적영지'는 텅 비어 고요한 가운데 신령스럽게 아는 것을 말한다. 마치, 초목의 씨앗을 쪼개고 또 쪼개어 보면 결국에서 물질이란 성분마저 없지만, 그 씨앗이 흙속에 있다가 봄이 되면 어떻게 아는지 싹을 틔우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의 마음을 육안으로 바라보아도 마찬가지이다. 형체와 빛깔과 냄새가 없으나 말을 하면 어떻게 알아듣는지 눈빛과 언어와 고개를 끄덕이는 등 표현을 한다. '어떻게 아는지 모르게 아는 것'을 신령스럽게 안다는 뜻의 영지라 부른다.

또한 공적영지의 발현되는 첫머리를 '광명'이라고 표현했다. 만물을 품은 세상이 있어도 어둠은 세상을 삼킨다. 달빛이나 별빛마저 없는 칠흑 같은 숲속에서는 한 치 앞의 모습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둠이 세상을 철저하게 머금는다. 새벽녘 동이 터 오르면서 어둠은 품었던 산과 나무와 시냇물과 집 등을 토해내며 그 모습들을 서서히 드러나게 한다. 성품에서 발현되는 근본지혜를 이처럼 동트며 비춰지는 광명으로 비유했다.

세상은 진리를 품었으나 공적영지의 광명이 아니면, 칠흑 속 어둠에서 존재하는 것처럼 진리를 알 수 없다. 욕심 많은 동물로서 목숨을 부지하고 재색명리의 놀이에 헤어나지 못하는 삶을 그저 인생의 전부로 아는 인간들에게 있어서, 진리란 어둠속에 갇힌 도무지 알 수 없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한 종교의 수행자가 복권을 사서 당첨되어 수십억을 받고는 그 신분과 일을 그만두고 사회인이 된 일이 있다. 진리의 눈을 뜨고 살아가고자 수행자가 되었으나 결국에는 욕심 많은 동물의 울을 넘지 못했다.

한국 사회에서 성공하여 명예와 부를 이루어 남부럽지 않게 살아가는 공부인들에게 간혹 질문을 던진다. "진리의 눈을 얻어서 살아가는 것과, 지금의 나를 있게 할 뿐만 아니라 미래의 편안한 삶을 보장해주는 이 직업 중 하나만을 택하라면 무엇을 택하겠습니까?" 삶이 고될지 모르는 진리의 눈을 얻어서 살아가는 것을 택할 수 있다면, 영혼이 진리를 품은 공적영지의 광명이 살아있는 존귀한 사람이다.

동물적인 욕심에 갇혀 잘 먹고 잘 살지라도 영혼이 가야할 길을 모르니, 마치 마른 웅덩이에서 노니는 올챙이가 햇볕에 의해 이내 말라죽게 되는 것도 모르는 것처럼, 영혼은 날이 갈수록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공적영지의 광명이 살아있는 사람은 동물적인 욕심에서 시작되는 관념과 막 길들인 습관에 속지 않고, 마음에 진리를 품고 진리적인 삶을 살아가고자 노력하게 됨으로써, 영혼이 아름답고 삶에 향기가 날뿐만 아니라, 영혼이 날로 진급해가고 영생의 길을 자유 할 수도 있게 된다.

<삼동연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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