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화 속에 깃든 인간의 생로병사

▲ 한선학 관장.
강원도 원주 치악산 명주사에 가면 천년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한국, 중국, 일본, 티벳, 몽골 등지에서 수집한 고판화 원판과 인출된 서적과 능화판, 시전지판, 부적판, 원본판화 4000여 점이 소장돼 있기 때문이다.
올해 고판화박물관이 개관 10주년을 맞아 '아시아 명품 고(古)판화' 30점을 공개 전시 중이다.

태고종 명주사 스님이기도 한 한선학 관장은 "근대 이전 한국과 중국, 일본에서 사랑받았던 목판화는 한때 갖은 재활용 도구로 전락했다. 20세기 초반 중국에선 목판을 뜯어 닭장을 만들었다. 일본은 나무 화로나 분첩을 만들었다. 국내에서도 비온 후 진흙탕이 생기면 목판을 깔거나 불쏘시개로 썼다"고 소개했다.

한 관장은 천대받던 목판의 가치를 일찍이 알아보고 꾸준히 모아 박물관을 개관한 것이다.
6월28일 고판화박물관을 방문했다. 그는 판화 속에 깃든 인간의 생로병사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국보급 판화, 불정심다라니경

한국 고판화 가운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판인 조선시대의 〈오륜행실도〉가 유리관 안에 전시돼 있다. 그런데 4각 통이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4각 일본 화로로 만들어 썼다. 훼손시킨 것이다"며 "당시 오륜행실도의 원형을 엿볼 수 있는 유일한 유물이다"고 소개했다.

〈오륜행실도〉는 조선 시대, 1797(정조 21)년에 이병모(李秉模) 등이 왕명에 따라 편찬한 책이다. 부자(父子), 군신(君臣), 부부(夫婦), 장유(長幼), 붕우(朋友) 등 오륜에 빼어난 150여 명의 행적을 추려 내용을 적었다. 그 옆 페이지에는 김홍도(金弘道)의 그림을 덧붙였다. '참다운 인생을 살며 태평성대를 염원'했던 정조의 간절한 뜻이기도 한 것이다.

덕주사판 불설아미타경 외 다수의 강원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소장품도 전시돼 있다.

또 중국 소장품으로는 중국학자들이 국보급으로 평가하는 '불정심다라니경(佛頂心陀羅尼經)'을 비롯해 명나라 '고씨화보'나 청나라 '개자원(芥子園)' 등 당대에 명성을 떨쳤던 판화와 화보 등을 만날 수 있다.

'불정심다라니경'은 명나라 헌종13년 성화(成化) 13년(1477)에 중국에서 판각된 경이다. 우리나라에는 8년 뒤 조선 성종16년(1485)에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가 수입해 조선에서 번각한 불경의 원판으로 알려져 있다.

불정심다라니경을 '온 마음으로 읽고 지니면 재앙을 피할 수 있다'는 신앙에 의해 널리 유통된 경전이다. 다라니는 지혜와 삼매(三昧:잡념을 버리고 한가지 일에 정신을 집중시키는 것)를 성취시켜 주는 힘을 지니고 있는 말씀으로 글자 하나마다 무한한 의미와 위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 불정심다라니경. 조선초기.

다라니경의 위력

한 관장은 다리니경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그는 "불교를 믿는 신도들은 죽을 때 탑다리니경을 몸에 지니고 간다. 49재를 지내는 동안 7번의 심판을 받는데 그럴 때 이런 다라니경이 필요하다"며 "저승세계 갈 때 부적과도 같다"고 설명했다.

여러 다라니경 중 최고의 다라니는 인디어 그대로 적어둔 것이다. 이를 진언이라 한다. 그는 "부처님이 무엇을 보고 '아-'하고 깨우치셨을 당시 뭘 보고 깨우치셨는지 옆에 있는 사람은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풀기 시작하면 오역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번역을 하지 않는다. 이곳에 보관되어 있는 다라니경은 인디어 원판화가 있다"고 설명했다. 다라니경을 몸에 지니기만 해도 부처님의 가피를 입는 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불교의 관점을 미신이라 치부하는 사상 때문에 신앙심이 약해진 원인이 되기도 했다"며 "다라니경은 경면주사로 찍어야 한다. 요즘은 인쇄한 것이 많다"고 밝혔다.

우리나라는 인구에 비해 다종교사회이다. 죽음의 문제에 관해서는 유교식이 많다. 이 점에 대해 그는 "국민들 마음속에 '죽으면 그만이다'는 사상이 널리 자리해 있다. 하지만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내세 즉 윤회를 믿어야 한다"며 "윤회에 대한 확신을 가질 때 삶의 태도가 달라진다. 즉 자살률이 많은 것은 종교적 책임이다. 이 세상을 살다가 억울하거나 일이 풀리지 않을 때 '죽으면 그만이다'는 생각을 버리고 긴 안목을 가진 마라토너의 시각으로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생에 못 이룬 일에 대해서는 다음 생에 와서 해 꼭 성골할 수 있다는 관점을 가진다면 죽음을 쉽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는 안타까운 마음을 호소했다. 더불어 종교가 사람들에게 죽음에 대한 관(觀)을 확실하게 심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요즘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에도 문제가 있다"며 "숨이 끊어지면 3일간 냉동실에 들어가 있다가 급하게 간다. 보내고 가는 길이 왜 그리 각박한지 모르겠다. 살아있을 때 예수제를 통해 자기의 죽음은 스스로 가치있게 준비해야 한다"고 죽음 이후의 세계를 신중하게 준비해야 할 것을 부탁했다. 종교를 믿는 사람은 죽기 전에 내가 입고 갈 옷을 정리해 두면 마음도 정리가 돼 한결 수월하다는 것이다.

또한 인쇄된 다라니경을 입관할 때나 다비를 할 때 같이 가져갈 수 있도록 하면 좋다는 것이다. 예수제를 거행 할 때도 사람들에게 나눠주면 그 공덕이 널리 미쳐간다고 설명했다. 신앙을 굳건히 해야한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종교는 악세사리가 아니다

그는 "중국, 마카오, 홍콩에서는 평소 망자가 원했던 삶을 종이로 만들어 태워준다"는 아시아권 장례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즉 건물이나, 비행기 등을 만들어 태운다. 이는 망자가 좋은 곳에 태어날 것이다는 믿음이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나라는 죽음 이후에는 모든 것이 끝난다는 생각 때문에 너무 실용주의로 간다"며 "내세에 대한 신념있는 사람은 긴 안목으로 산다. 영원한 것이 있음을 알고 인생을 편안하게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종교인의 장점이다. 그런데 요즘은 워낙 바쁘게 사는 사람이 많아서 쉽게 살려고 한다. 종교를 악세사리처럼 믿는다. 일주일 내내 나쁜짓 하고서 일요일 하루 신앙을 하러 간다"는 현대인의 신앙 자세를 비판했다.

판화를 통해 '나도 갈 수 있다'는 극락세계를 염원해 보자는 것이다. 그는 "사람의 마음은 서원을 세우고 염원하는 데로 이끌려 간다"고 설명했다.

전시된 판화를 자세히 살펴보면 인생의 생로병사를 표현한 것이 대다수이다. 또 죽음 이후에 간다는 육도윤회도, 시왕도(十王圖), 지옥도 등도 있다.

박물관을 가까이 하면 인생을 창의적으로 살아 갈 수가 있다.

그는 "유물 하나하나가 갖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 전통에 근본한 새로운 이야기를 엮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고 박물관과 친해지기를 부탁했다.

고판화를 유심히 보면 이생에서의 내 인생 판화를 어떻게 새겨야 할지 그림이 떠오른다. 이제부터라도 각자 생로병사의 간절한 염원을 담은 아름다운 판화를 새겨보자.
▲ 일본판 지옥도 족자. 사람들은 이 족자를 보며 생활 속 마음 자세를 가다듬기도 한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