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현정 교도/상인교당
벌써 다섯 학기 째 동명마음공부대학 강의를 듣고 있다. 발전이 없다고 조바심을 내고 자책 할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런데 학기 종강을 맞아 돌아보니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가장 눈에 보이는 변화는 가족과의 변화다. 마음공부대학에 들어올 당시 나는 결혼생활도 실패했고 직장에 다닐 능력도 없다고 생각했다. 또 돈도 없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세상을 원망하는 일밖에는 없었다. 결혼 후 홀로 설 자신이 없어서 웬만하면 이혼하지 않고 참으면서 살다가 시어머니와 남편이 늙고 힘이 떨어지면 그때 복수를 하겠다고 다짐을 했었다.

나는 두 번 이혼을 했다. 첫 남편은 다 좋은데 바람을 피워 도저히 용서가 안됐다. 두 번째 남편은 마마보이에다 가정적이지도 못하고 피해의식이 강해 대화가 안 되는 답답한 사람이었다. '나는 어쩌면 이렇게 남자 복이 없을까' 한탄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나는 이혼을 하고서도 분이 안 풀려 화병이 걸릴 지경이었다.

직장생활 잘하고 있는 나를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꼬드길 땐 언제이고 이제 돈 한 푼 없이 이 모양 이 꼴을 만든 남편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남편의 여동생이 우리 오빠와 결혼하여 나의 올케가 됐기 때문에 이혼을 하고 서도 나는 그 집안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친정에 살고 있는 나는 명절이면 올케와 마주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마다 우리 집은 살얼음판이 됐다. 오빠내외와 2대1로 싸운 적도 있다. 지금은 억지로 나를 마음공부대학에 입학시켜주신 어머니에게 참 감사한 마음이다. 입학 후 1년은 정말 재미없었다. 특히 이형은 교무님과 함께하는 교화단 마음공부방은 정말 재미없었다.

다들 공부하는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내가 왜 저런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돼?' '나는 공부가 안돼서 죽겠는데 지금 내 염장을 지르는 것도 아니고 자랑하는거야?'하는 마음이 계속 올라와 참기 힘들 때가 많았다. 나이가 적다는 이유로 총무를 시켜놓아서 그나마 1기를 다닐 수 있었다. 또 할머니 공부인들이 많아 칭찬을 해주시니 가방만 들고 왔다 갔다 했다. 그러다 2년 째 되던 해 중도하차를 결심했다. 그런데 형은교무님께서 챙겨주고 지지해주는 마음에 큰 감동이 있었다. 마음공부대학에서 마음공부하며 올케를 통해 올라오는 분노, 남편을 통해 올라오는 분노, 시어머니를 통해 올라오는 분노, 지난날의 억울함과 원망과 분노가 올라 올 때마다 그것을 진리로 신앙하는 공부를 했다.

처음에는 도저히 교무님의 강의가 수용되지 않았다. 도무지 대소유무가 먹혀들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올케가 집에 온다고 하면 피경도 했다. 신세 한탄을 하며 꼼꼼히 생각해 봐도 내가 피해자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남편에게 얻어맞은 것도 억울하다고 했더니 교무님은 "폭력을 쓰는 사람보다 폭력을 당한 사람에게 폭력성이 더 있다" 하시면서 내안의 폭력성이 폭력을 끌어당겼다고 하셨을 때는 정말 화가 나기까지 했다.

올케를 통해 요란함이 있어질 때 마다 일원상의 진리, 일원상의 신앙을 치열하게 공부를 했다. 그러면서 내 상처를 많이 만났고 공부하면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 한동안 분노공부를 하면서 올케와 남편, 시댁식구들 경계가 잦아 들고 나니 뒤이어 찾아오는 자괴감 초라함 공부를 많이 했다.

초라함 공부를 하면서도 많이 울었다. 그때는 아름다운 초라함이라고 이름을 붙여서 초라한 마음이 올라 올 때마다 그 마음을 숨기려 하지 않고 대소유무이치로 신앙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이제는 내 자신이 그렇게 초라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초라해지는 것이 두렵지도 않다. 초라한 마음이 올라오면 초라한 공부를 하면 된다는 자신감에서이다. 아마도 시어머니와 남편과 시누이, 모두가 나를 공부시키기 위해서 만난 인연들이다.

최근 전 남편이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연락이 온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중요한 것은 다시 시작하고 안하고가 아니라 순간순간 공부만 하면 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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