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유영 교도·하단교당(논설위원)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는 〈정전〉 '영육 쌍전법'에서 수도인들의 놀고먹는 폐풍을 비판했다. 수도인이라고 하면 불가의 출가 수행자, 곧 스님을 일컫는다. 과거 수도인이라고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꼭 그것이 과거의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원불교도 그렇다. 출가 수도와 세간생활을 나누어 보지 않고 '불법시 생활, 생활시 불법'이라 해서 불법을 실천해서 생활을 윤택하게 하고 생활속에서 불법을 닦아 불법의 생활화를 추구한 오늘날 원불교의 현실을 보면 놀고먹는듯한 수도인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한 달에 서너 번 법회 보는 것을 직업으로 내세우는 것은 낯간지럽다. 그것도 열 명도 채 안되는 사람들을 모아 놓고 설교를 하는 정도라면 이것을 교당으로 보기도 어렵다. 이런 교무는 대종사의 '수도인 가운데 직업 없이 놀고먹는 폐풍이 치성하여 개인 가정 사회 국가에 해독을 많이 끼쳤다'는 지적에서 벗어날 수 없지 않을까 싶다. 이것은 영육쌍전을 지향하는 새 종교의 모습은 아니다. 대종사는 놀고먹는 이들로 비판한 재래 불교의 승려도 이렇게 살지는 않았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백장 청규는 불가의 전통이었다. 재래 불교에서도 수도인들이 이렇게까지 놀고먹지는 않았다. 더구나 재래불교에서 조차 동령과 탁발을 폐지한지 오래다.

대종사는 불교를 혁신하여 수도와 생활이 둘이 아닌 새로운 종교를 건설했다.

대종사는 대각 후에 종교운동을 일으키기 전에 먼저 조합을 만들어 금주, 단연, 절약, 저축과 간척사업으로 자립경제의 기반을 닦았다.

그 다음 교법을 준비하고 총부를 정하고 불법연구회를 창립했다. 회원들은 낮에는 엿장사, 숯장사, 밭갈이, 양잠, 축산, 고무신, 공장의 직공 등 다양한 형태의 노동에 종사했다. 밤에는 법회를 열어 수도에 힘썼다.

이른바 주경야독으로 출가수도와 세간생활을 아우름으로써 영육쌍전을 실천했던 것이다.

대종사는 소수인의 불교를 대중의 불교로 혁신했다. 재래 조선불교는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정치 이념에 따라서 소수인의 종교로 전락했다. 교리와 제도는 출세간 생활하는 승려를 본위로 했다. 세간 생활하는 속인에게 맞지 않았다. 세간을 살아가는 신자는 주인이 되지 못하고 손님과 같았다. 보통 신자는 부처님의 직통제자로나 조상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원불교의 교단은 재래불교의 교단이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의 사부 대중으로 구성되는 것과는 다르다. 소태산 대종사는 재가신자나 출가 수행자를 구별하지 않았다. 대종사 자신도 재래 불교의 처지에서 보면 출가한 승려가 아닌 재가 거사였다. 스스로도 거사(석두거사)로 불렀고 불교의 승려들은 청신사(우바새)로 부르기도 했다.

우리 원불교는 불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집 있는 곳에서 집 없는 곳으로 가는 출가제도가 없었다. 수행자 즉 교무에게도 결혼을 자유로 선택하게 하여 가정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 그래서 전무출신이란 새로운 수행 공동체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무출신 제도는 대종사의 본의와는 다르게 재가와 출가를 구분한다. 전무출신 지원자들이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나 영산선학대학교에서 공부한 다음 대학원대학교를 거쳐서 교무가 된다. 하지만 교단 현실은 교도수가 너무 적어서 전업 교무로 할 일이 없는 이들이 생겨나게 된다. 이렇게 해서 놀고먹는 재래 불교의 폐풍을 답습하는 일부 교무가 생겨났다.

교단에서 교무에게 일정한 일거리를 만들어 주지 못한다면 교무에게 생계를 유지할 직업을 따로 갖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교무가 세간 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사귐으로써 교화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장점도 있다. 교무가 본보기로 수도와 생활이 둘이 아닌 영육쌍전을 몸으로 보여 준다면 교화는 저절로 된다.

이렇게 되면 능력있고 신념있는 불자들이 더욱 많이 교역을 지원하게 되어 교역자의 자질도 높아질 것이다. 또한 재가와 출가를 차별하지 않은 대종사님의 혁신정신에도 부합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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