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이웃을 행복으로 이끄는 인권

▲ 오창익 인권운동가.
사회적으로 인권에 대한 문제에 대해 날이 갈수록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인권문제도 부단히 변화하고 있으며 때로는 사회적 이슈로 대두되기도 한다.

6월25일 교정원 기획실은 중앙총부 법은관 대회의실에서 인권특강을 열어 인권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환기시켰다. 이날 인권연대 오창익 사무국장이 '나와 이웃을 행복으로 이끄는 인권'이란 주제로 특강을 했다.

인권은 '모든 사람의 권리'

어렸을 때는 역사는 진보한다는 신념 같은 것이 있었다. 지금 사회를 보면 '과연 역사가 진보하고 있는가'라는 회의가 든다. 단군이래 4∼5천년동안 인구의 절대 다수가 지금처럼 생계위험을 느꼈던 적이 있었을까?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어렸을 때는 시간이 지나면 좋아진다는 희망을 갖고 살았었다. 지금은 그런 희망도 없어졌다.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지금이 제일 힘들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제2차 세계대전. 모든 전쟁이 그렇듯 참혹한 전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때 5천만명이 죽었다고 추정하고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이다. 소련 한 나라에서만 3천500만명이 죽었다고 한다. 인간이 진보했다고 생각하고 과학기술로 많은 것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끔찍한 자기파괴에 쓰였다는 것을 인간은 2차대전을 통해 확인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이런 식의 자기 파괴행위에 스스로의 운명을 맡겨 놓을 수 없다고 성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인간이 도출해 낸 것이 인권이다.

인권이란 말은 우리의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등을 통해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어떤 실체를 갖고 있지는 않다. 온전히 우리의 머릿속에서 나온 개념이다. 다 아는 것처럼 인권은 인권(人權)란 한자어에서 빌려온 것이다. 일본사람들이 19세기에 번역한 단어인데 놀랍게도 한국, 중국, 일본 모두 인권이라고 쓰고 있다. 어느 나라의 말로 표현하던 간에 인권은 '사람의 권리'라는 뜻이다. 인권은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행복하게 살기 위해 누려야 할 권리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인권은 '모든 사람의 권리'이다. 한국의 최고위 규범인 헌법만 봐도 알 수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10조부터 제27조는 헌법의 가장 중요한 핵심으로 '모든' 국민의 인권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 제10조부터 제37조까지의 여러 조문은 각기 다른 내용에도 불구하고 '모든 국민은 OO한 권리를 가진다'라는 문장이 반복되고 있다.

권리는 모든 국민이 동등하게 갖고 있다. 어떤 사람만 권리를 갖고 있다면 그것은 '특권'이라 불러야 한다. 이처럼 인권은 보편성을 기본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인권에 있어서 보편성(평등성)은 인권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자 잣대이다. 사람은 똑같이 귀하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원칙이고 전제이지만 이것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경찰관 채용시험에서 '경찰관이 되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100m를 15초 내에 들어와야 한다'고 하면, 보기에는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것 같지만 사실 속내는 여성경찰관을 뽑지 않겠다는 것이다. 물론 15초 내에 들어오는 여성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남성이 빨리 뛴다. 성 역할은 다른 것이다. 평등하다는 것은 낮은 차원의 전제조건일 뿐이다. 그것으로는 인권이 실현되지 않는다.

소수자의 원리

인권의 보편성이 가진 허구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인권보다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하다. 그것이 소수자의 원리이다. 가난한 사람, 소수의 사람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것을 말한다.

장애인 이동권 투쟁의 성과로 지하철에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 리프트 등이 설치됐다. 그런데 막상 우리가 일상적으로 목격하는 바에 따르면 지하철에서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휠체어가 아니면 이동 할 수 없는 장애인들이기보다는 나이가 많은 어르신들, 임산부나 어린아이를 동반한 젊은 부모들이다. 이것이 바로 가난한 사람, 소수의 사람을 우선적으로 선택한 결과를 보여준다. 엘리베이터 공사를 통해 휠체어가 아니면 이동할 수 없는 장애인들의 사람값을 높여주니까, 그것보다 나은 사람들의 값도 한꺼번에 올라가는 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인권이란 말은 우리를 지켜주는

중요한 무기가 될 수 있다


사람답게 살기 위한 인권

인권은 사람답게 사는데 쓴다. 누구나 사람답게 살기를 원한다. 사람답게 살려면 필요한 것이 아주 많다. 이를테면 입지 못하는 것, 입지 못하는 것이 별거 아닌 것 같은데 누구는 입고 있고 누구는 벗고 있으면 굉장히 심각한 문제가 된다. 다른 사람의 앞에서 신체를 드러낸다는 것은 정말 치욕적인 일이다. 옷이 벗겨진 상태에서 고문을 당한다든가 생리적 현상 때문에 감시카메라와 다른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배설을 해야 한다면 자괴감 때문에 견디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답게 살려면 옷을 입고 있어야 한다. 자유도 마찬가지다.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양심 사상, 학문 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 신체의 자유 등 매우 많다. 신체의 자유를 보면 신체를 제한하는데 이것이 형벌이 된다. 감옥에 가면 재워 주고 먹여 주고 운동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누구든 감옥에는 가고 싶지 않아한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의 신체의 자유를 빼앗아버렸기 때문이다.

다시 인권이란 단어로 돌아가면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무엇, 행복하게 살기 위해 누려야 할 무엇을 왜 하필 권리라고 말하는가? 그 이유는 권리와 짝한 의무 때문이다. 의무와 짝하지 않는 권리가 없다. 권리와 의무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권리와 의무가 짝이긴 하지만 마치 의무를 해야 권리가 있는 것처럼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한국에 그런 것이 많다. 우리가 권리의 주체인데 의무 주체인 것처럼 오해되고 곡해되는 경우가 많았다. 의무 주체인 것처럼 의무를 강요받아 왔기에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권리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게 됐다. 한국사람들은 거의 DNA수준으로 몸에 배어있다.

내가 이태원에 살고 있는데 우리 아들 모두가 이태원초등학교를 나왔다. 그 초등학교 교가를 보면 마지막 가사에 '우리는 나라의 방패'라는 구절이 있다. 어린이들은 나라의 방패로 쓰면 안된다. 초등학생이 6년 동안 입학식 졸업식 때 부르는 교가이다. 이런 것이 반복되다 보니 사람들이 어떻게 오해하냐면 권리와 의무가 짝이라는 걸 의무를 다 해야 권리가 생긴다고 오해한다. 전혀 그렇지 않다. 권리는 아무런 전제조건을 없어도 된다.

국가를 위해서 누구나 다 국방의 의무을 이행해야 하지만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 전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고 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의무가 권리의 전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권리는 그냥 있는 것이다.

권리와 의무가 짝궁이라고 하는 것은 누군가의 의무를 확인하고 불러내기 위해서이다. 그 해답은 헌법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헌법 제10조에 보면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인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가진다'고 밝혀있다.

왜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그 무엇을 권리라고 하는가 하면 국가의 의무를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국가의 의무를 호출하기 위해서이다. 국가의 역할이 일탈되거나 왜곡되면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변화하는 인권

인권문제의 특징이 여러 가지가 있다. 하나는 변화한다는 것이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보통의 경우에는 시대를 따라 늘어난다. 지금 서울에 있는 대학에서 필요한 것 중의 하나가 캠퍼스내에서 와이파이가 되게 해달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상상도 못한 권리이다. 성소수자 문제도 20년 전에는 누구도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새로운 인권문제가 출현하기도 한다.

또 하나는 사람이란 존재가 복합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밥 세끼만 먹는다고 해결되지 않는 속성들이 있다. 필요하고 보장받아야 할 것들이 늘어난다. 2013년의 인권문제와 10년전 20년전의 인권문제가 완전히 양상이 달라진다. 인권이 변화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늘 안테나를 세우고 있고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인권문제에서 도태될 수 있다.

인권의 불가분성

인권은 나눠질 수가 없다. 서울역에서 노숙인들에게 무료급식하는 것을 보면 가슴이 벌렁벌렁할 때가 있다. 대체로 이런 풍경이다. 노숙인들은 급식판에 받을 받아서 길거리에 앉자 먹는다. 밥을 먹는 것은 중요한 권리이다. 그런데 사람이란 존재는 문명적 DNA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밥을 먹더라도 부끄럽지 않게 먹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은 존엄하고 가치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밥도 존엄하고 가치있게 먹어야 한다.

노숙인들도 밥을 먹어야 살지만 밥을 남들이 다 보는 상태에서 원숭이처럼 먹으면 안되는 것이다. 인권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밥 세끼를 주는 것만으로 너무나 훌륭한 사랑의 실천이다. 인권의 눈으로 재구성해 보면 그렇지 않다. 밥 준다고 해결되는 것은 반도 안된다. 밥을 먹되 창피하지 않고 부끄럽지 않게 죄책감이나 모멸감을 느끼지 않게 먹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의 권리 또는 몇 개의 권리만 보장된다고 해서 인권이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인권의 여러 목록은 모두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고 이중 단 하나의 결핍만 있어도 사람은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된다. 사람들이 밥만 먹고 살 수 있다고 해서 인권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다 갖춰져야 인권이 보장되는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일터나 가정 등 생활공간에서 의식적으로 인권이란 말을 자주 사용했으면 좋겠다. 인권이란 말은 우리들을 지켜주는 중요한 무기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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