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광익 교무의 '반야바라밀다심경'

▲ 향엄지한선사
질량 보존의 법칙이 있다. 이는 화학반응 전의 물질의 총질량과 반응 후에 생성된 물질의 총질량이 같다는 화학의 기본법칙이다. 이를 질량불변의 법칙(質量不變-法則)이라고도 하며 또 물질 불멸의 법칙과도 같은 뜻이다.

1774년 프랑스의 A.L. 라부아지에가 발견했다. 화학반응이라는 것은 처음에 있던 물질이 그 구성요소(원자)를 바꾸어 모습ㆍ모양이 다른 새 물질을 만드는 것이며, 결코 무(無)에서 유(有)가 생기는 것이 아님을 밝히는 데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전 우주적으로 질량보존의 법칙이 성립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유한한 자원을 어떻게 유효하게 쓰느냐 하는 이론의 기반인데, 이 이론도 1908년 독일의 H. 란돌트와 이듬해 헝가리의 R. 외트뵈시 등이 엄밀히 검토ㆍ확립했다. 보존의 개념에서는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는 계(系)를 설정해야 한다. 화학반응에서 일정량의 물질을 일정한 기구(器具) 속에서 반응시키는데, 질량에 착안할 경우에는 기구 밖의 물질을 고려해 넣어서는 안 된다. 이 경우 일정한 기구가 계에 해당하는데, 예를 들면 플라스크가 이것에 해당한다. 만일 책상 위에 있는 먼지가 혼입되면 질량보존은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전우주적으로 보존의 개념을 생각하는 것은 계가 큰 만큼 여러 가지 논의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소립자(素粒子)란? 유형무형(有形無形)의 모든 것을 구성하고 있는 가장 작은 단위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눈에 보이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쪼개고 쪼개서 더 이상 쪼갤 수 없을 때까지 쪼개면 아주 작은 알갱이가 되는데 이것을 소립자이다. 따라서 소립자의 입장에서 보면 만상은 소립자로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생명공동체(生命共同體)'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말한다면, 만상(모든 것)의 본질이 소립자라는 말인데, 이 말은 소립자는 무한한 가능성(창조)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소립자가 어떤 성품(성질, 원리)을 지니고 있느냐의 문제는 매우중요하다.

이와 같이 소립자는 모든 것을 구성하고 있는 최소한의 물질이면서, 소립자끼리는 항상 서로 소통하고 있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 현실도 긍정적으로 나타나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현실도 부정적으로 나타날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거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거나, 사람의 마음에 따라 물의 결정체가 바뀌고, 식물의 성장에 영향력을 미치게 하거나, 텔레파시가 서로 통하는 등 오늘 날 과학은 많은 것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발달한 양자물리학에서 이러한 자연(우주)의 진실을 찾아낸 것은 깨달음의 세계의 핵심사상인 '불이(不二):둘이 아니다(불이(不異):다르지 않다) 사상', '중도사상(中道思想)', 공사상(空思想)'을 과학적으로 명확하게 증명한 것이기 때문에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양자물리학에서 찾아낸 소립자의 성품과 깨달음의 세계에서 말하는 핵심 원리가 거의 흡사하기 때문에 그동안 분리되어 왔던 형이상학(정신계, 종교)과 형이하학(물질계, 과학)을 비롯한 만상이 하나로 통하게 됨으로써 모든 분별이 사라지게 됐다.

소립자가 모든 것의 근본 물질이기 때문에 소립자의 이중성(二重性),상보성(相補性)을 받아들임으로써 이제는 자연을 보다 더 명확하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상반되는 두 개의 개념을 함께 적용시켜야 한다.

이것은 종교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종교의 이름과 교리는 다른 것 같으나 본질에 있어서는 같기 때문에 내가 믿는 것만 알아서는 안 되고, 다른 것도 알고, 이것과 저것을 서로 연결해서 알아야 보다 더 확실하게 알 수 있고, 그래야 분별하거나 차별하지 않게 된다는 말이다.

성어에 조삼모사(朝三暮四)라는 말이 있다. 춘추전국시대 송(宋) 나라에서 원숭이를 키우던 사람 저공(狙公)이 원숭이 무리에게 먹이를 주었다. 아침에 셋을, 저녁에 넷을 주었다니 길길이 뛰어 할 수 없어 같은 양이지만 아침에 넷, 저녁에 셋을 주었더니 모두 기뻐했다는 이야기가 〈장자(莊子)〉에 실려 있다.

즉 아침에 세 개를 주던, 네 개를 주던 간에 질(質)에 있어서나 양(量)에 있어서 조금도 변함이 없이 같은 개수 같은 상황이다. 다만 변한 것이 있다면 아침과 저녁인데 하루를 기준으로 한다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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