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께서는 성품에서 분별로 나타날 때 진리를 품게 했고, 그 진리의 분별은 천조(天造)의 대소유무(大小有無)이다. 전에 없던 독창적인 진리의 관점으로 세상을 통찰하게 했다.

공부인이 처음에는 대소유무에 대한 이해를 하고, 이후에는 사사물물을 대소유무로 보는 연습을 한다. 나아가 생각을 궁굴리지 않아도 되는 동물적 감각으로 이어질 때, 천조의 대소유무는 비로소 나의 의식작용이 될 수 있다.

대소유무에서 대는 근본, 소는 나타남이고 유무는 운용됨을 말한다. 원불교 교리로서 대는 법신불 일원상이고, 소는 사은(四恩)이며, 유무는 수행, 인과, 삶 등이다. 사람을 실례로 대는 영혼, 소는 몸이고 유무는 육근동작, 생로병사 등이다. 이처럼 대소유무를 입체적인 관점에서 봤지만 평면적인 관점으로도 볼 수 있다. 대는 숲이고 소는 나무 개체들, 그리고 유무는 숲과 나무의 유기적인 조화로움이다.

우주의 이치, 세상, 인간, 삶, 자연 등을 대소유무로 나누어 보기도 하고, 다시 묶어서 하나로 보기도 하고 본질로도 보아야 한다. 나아가 의두삼아 생각하고 바라보다가 생활 속에서 하나하나 실천하다보면, 대소유무가 의식 작용의 바탕으로 자리하여 숨 쉬게 된다.

나눠보는 이유가 이해와 응용의 차원이라면, 하나로 묶거나 본질에 의해 보는 이유는, 개체의 일과 세밀한 일에 몰입하다가 전체와 본질을 망각할 수 있음을 간과하지 않기 위함이다. 나아가 화두를 삼고 생활에서 증득해가다보면 깊은 이해와 삶의 지혜로 이어지다가 결국에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자리하게 된다. 대소유무를 삶이 아닌 생각으로 궁굴린다면 아직 내면화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내면화된 진리라야 삶에서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아나운서 공개 시험을 보는 자리에서 '어려움에 처한 심경을 표현'하라는 말에 한 응시자는 욕설을 섞어가며 리얼하게 표현했다. 심사 위원은 "리얼한 부분은 좋았는데 평소에도 그런 말을 자주 쓰냐?"고 하니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심사 위원은 평소에 쓰는 말이 아닌데 즉흥적인 상황 묘사에서 그런 말이 나온다는 것은 내면의 의식에 그런 말이 자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결국에는 불합격의 빌미가 됐다. 내면화되지 않은 학습은 '그렇게 되면 좋다는 것을 아는 것'이지 '그렇게 되지는 않음'을 일컫는다.

사람들의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일반적은 생각들은 '어떻게 먹고 살고, 좀 더 풍요롭게 살 것인가.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누리며 살거나. 내 살붙이에게 잘 물려줄 것인가'에 있다. 일반적으로 진리를 삶의 중심에 놓고 살아간다는 것은 희유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원불교인들은 진리에 의한 삶이 상식처럼 되어있다. 어쩌면 너무도 쉽게 밝혀주니 소중함마저 저버린 채 고급지식의 유희로밖에 삼지 않는지 모르겠다.

<삼동연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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